한국일보

슈만·조성진·메타·말러

2023-12-13 (수)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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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으로 슈만과 클라라가 유명하다.

슈만은 젊은 시절 라이프치히에서 피아노교육자 프리드리히 비크를 사사했는데, 그의 딸이 당시 피아노 신동으로 유명한 소녀 클라라였다. 독선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피아노만 치던 클라라는 아홉살 연상의 미남청년 슈만에게 홀딱 반했다. 두 사람은 몰래 사랑을 나누다가 클라라가 18세가 됐을 때 결혼하려고 하지만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친다. 빈털터리 무명의 음악가인데다 여성편력도 있었던 슈만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두 연인은 법원에 호소했고 3년여의 법정투쟁 끝에 승소하여 클라라가 21세 되던 해 결혼에 성공한다.

이후 슈만은 안정된 생활 속에 왕성하게 창작하며 작곡가와 평론가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지만 행복은 얼마 안가 그의 정신병 발병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던 그는 라인강에 투신했다가 구조된 후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46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음악적 동반자였던 클라라는 이후 40년간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피아노 공연과 편곡으로 남편의 음악을 알리다가 1896년 그의 곁에 묻혔다. (여기에 평생 클라라를 짝사랑했던 브람스 이야기까지 더하면 더할 수 없는 신파가 되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로베르트 슈만은 수많은 가곡, 오라토리오, 교향곡, 실내악곡들과 함께 100개가 넘는 피아노곡을 남겼는데 그중 많은 작품이 클라라를 위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의 유일한 피아노협주곡(A단조, Op.54)은 아내에 대한 열렬한 사랑고백으로, 낭만주의 피아노협주곡의 정점으로 꼽힌다.

1845년 클라라가 초연했던 이 작품을 조성진이 지난 7~10일 나흘 동안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주빈 메타의 지휘로 LA필하모닉과 협연했다.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연주였다. 섬세하고 명징한 연주로 유명한 조성진은 쇼팽과 라벨 등 워낙 낭만주의 음악에 뛰어나지만, 이 슈만 협주곡에서는 특히나 더 시적인 감성을 충만하게 표출하며 청중을 무아의 경지로 이끌었다. 기교를 앞세운 다른 피아노협주곡들과 달리 오케스트라와의 대화가 중요한 이 작품을 조성진과 메타와 LA필은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서정과 격정을 넘나드는 매혹적인 노래로 풀어냈다.

LA필 연주로 이 협주곡을 들은 건 2015년 ‘피아노의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올해 4월 김선욱의 협연 이후 세 번째다.

역전의 노장 아르헤리치(82)는 나이 들면서 이 협주곡을 가장 자주 연주하고 있는데 ‘야생마’라는 명성 그대로 거침없이 저돌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스파크가 일어날듯 강렬하게 내리꽂는 타건으로 일관된 레전드의 연주였다. 반면 김선욱은 사랑의 드라마를 수채화로 풀어내듯 감미로운 연주였다고 기억된다. 감정선을 섬세하게 살린 연주로 많은 박수를 받았다.

한편 임윤찬도 지난 10월초 유럽에서 이 협주곡으로 극찬 받았다. 10월1일 헝가리 라디오심포니(지휘 리카르도 프리차)와 12일 프랑스 라디오필하모닉(지휘 정명훈)과의 연주를 유튜브에서 동영상 없는 녹음으로 들어볼 수 있다. 그의 연주는 언제나 ‘완벽’이라는 표현을 절로 떠올리게 한다. 열정과 섬세를 둘 다 놓치지 않는 연주, 한음 한음이 특별하게 들리는 터치와 프레이징, 그러면서도 선이 굵고 절제됐다는 느낌을 준다.

피아니스트마다 개성이 다르니 같은 콘체르토를 여러 느낌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축복이라 하겠다.

마에스트로 주빈 메타는 이날 조성진과의 협연에 이어 2부에서 말러 교향곡 1번을 지휘했다. LA필 명예지휘자인 그의 나이 87세, 신장암과 고관절수술 및 어깨수술 등 노환을 모두 이기고 아직도 매년 디즈니홀을 찾아 놀라운 스태미나를 자랑하고 있다. 이번에도 말러의 가장 젊은 교향곡, 1시간에 달하는 대작을 4일 연속 지휘한 후 또다시 14~17일 나흘 동안엔 베토벤 교향곡 3번과 6번을 한 번에 지휘하는 프로그램을 이끈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와 부축을 받아 단상에 오른 다음 의자에 앉아서 지휘했다. 제한된 손짓과 지휘봉만으로 그 큰 오케스트라를 일사분란하게 호령하는 모습은 말러 1번의 타이틀 ‘거인’(Titan)을 연상케 했다. 이 작품은 100명이 넘는 관현악 편성에 워낙 스케일이 크고 연주시간이 1시간에 육박하는데 메타는 이번 연주에서 삭제된 2악장 블루미네(‘꽃의 노래’)를 포함시켜 1시간을 훌쩍 넘기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구스타프 말러는 첫 교향곡을 초연한 후 악평이 쏟아지고 출판업자로부터 너무 길다는 불평이 나오자 몇 년 후 개정판에서 블루미네(안단테) 악장을 빼버렸다. 그런데 이날 연주를 들어보니 왜 삭제됐는지 알 것 같았다. 감상적이고 로맨틱한 멜로디가 갑자기 축 처지는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1번 심포니의 전체 악상과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주었다. 현재는 아무도 블루미네를 연주하지 않고 있는데 메타가 왜 돌연 이 악장을 포함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알 바 없다. 메타의 말러 1번은 장중하고 고전적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러 1번은 구스타보 두다멜의 것이다. 그는 2009년 LA필 음악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첫 콘서트에서 이를 연주했을 정도로 최애 교향곡의 하나로 꼽는다. 지난 10여년 간 그는 LA필과 이 작품을 여러번 연주했는데 그때마다 생기 넘치고 열정적인 지휘로 젊은 말러의 총기를 가득 불러내곤 했다. 춤을 추기도 하고 펄쩍펄쩍 뛰기도 했던 그의 에너지가 지금도 뜨겁게 느껴진다.

두다멜은 오는 1월11일과 12일, 신년 벽두에 말러 6번을 지휘한다.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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