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두다멜, 임윤찬, 베토벤, 슈만

2026-02-18 (수) 12:00:00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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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은 구스타보 두다멜이 LA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서 디즈니 홀 포디엄에 서는 마지막 해다, 지난 17년 간 LA필의 전성기를 이끈 그는 오는 6월초 천사의 도시에 작별을 고하고, 9월에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예술 감독으로 부임해 최정상의 음악 커리어를 이어간다.

자신을 세계적인 스타지휘자로 우뚝 서게 한 도시에 대한 감사와 고별의 마음일까, 남은 4개월 동안 그가 선사하는 마지막 프로그램들은 어느 때보다 다채롭고 진지하다. 무려 10개 프로그램, 26회 공연에 달하니 과거 어떤 시즌보다 충실하고 풍성하게 느껴진다.

이중 가장 특별한 것은 지난 주말 연주된 베토벤의 극음악 에그몬트(Egmont)와 이번 주말에 3회 공연이 예정된 장엄미사(Missa Solemnis)로, 두다멜이 이 곡들을 LA필과 연주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에그몬트 서곡을 연주한 적은 있지만, 부수음악들까지 전곡을 연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다멜은 오랫동안 에그몬트와 장엄미사 연주를 꿈꿔왔으나 자신과 오케스트라가 충분히 준비되기를 기다렸다고 말한다. 특히 베토벤이 자신의 최고역작이라고 했던 장엄미사곡은 지휘자가 충분히 성숙하기 전에는 연주하기 힘든 대곡이어서 음악감독으로서 17년을 보낸 지금에서야 완벽한 때라고 느낀다며 마침내 도전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 공연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초청된 2개의 대규모 합창단이 출연하고, 한인테너 백석종이 4명의 독창자 중 한명으로 무대에 서게 돼 기대가 남다르다.

한편 지난 주말 열린 두다멜의 올해 첫 콘서트는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배우 케이트 블란쳇의 출연으로 4일 내내 만석의 성황을 이뤘다. 프로그램은 리카르도 로렌츠의 ‘훔볼트의 자연’, 슈만의 피아노협주곡, 그리고 베토벤의 에그몬트 전곡(Egmont Incidental Music)이었다.

임윤찬의 디즈니 홀 공연은 두 번째다. 작년 10월에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리사이틀 데뷔했고, 오케스트라 협연은 이번이 처음이라 그만큼 기대가 컸다. 전에 할리웃 보울에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과 베토벤 5번 황제를 협연한 적이 있으나, 주변이 너무 산만해서 디즈니 홀 연주를 기다려온 것이 사실이다.

그 기대와 기다림을 저버리지 않고 임윤찬은 정말 환상적으로 잘 쳤다. 큰 매력을 못 느끼던 슈만 협주곡을 그렇게 열심히, 구석구석, 가슴 저미는 감동을 안고 들어보기는 처음이다.

이 협주곡은 피아니스트 아내 클라라에 대한 슈만의 사랑고백이다. 장인의 극렬한 반대로 법정투쟁까지 벌여가며 결혼에 성공한 두 사람이었으니, 전 곡에 걸쳐 그 애틋한 드라마가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1악장 서두에 오보가 노래하는 ‘클라라의 주제’를 중심으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부드럽게 대화하며 밀고 당기는 사랑놀이가 이어지고, 마침내 경쾌하고 힘찬 환희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며 달콤하고 행복한 사랑의 완성을 노래한다.

임윤찬은 섬세하고 시적인 표현과 격정적이고 파워풀한 순간을 오가며 유려하게 건반을 수놓았다. 언제나 그렇듯 완벽하게 통제된 터치로 한음한음 명료하게 표현하면서 전체 흐름을 유장하게 가져가는 연주였다. 오케스트라와의 합주도 기막히게 좋았다. 두다멜과 얼마나 섬세한 호흡을 보이던지, 눈짓과 바디 랭기지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두 사람의 완벽한 연주에 가슴이 벅차올 정도였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2부에 공연된 베토벤의 극음악 ‘에그몬트’였다. 에그몬트는 16세기 스페인 압제 하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처형된 네덜란드의 영웅으로, 베토벤은 괴테가 쓴 희곡에 부쳐 서곡과 9개의 부수음악을 작곡했다. 느리고 장대하며 처연한 서곡에 이어 연인 클레르헨의 노래와 막간음악들, 그리고 내레이션으로 구성된 작품인데, 두다멜은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특별한 무대를 만들었다. 그는 작년 6월 베를린 필과 이 곡을 연주했을 때는 괴테의 오리지널 극본을 사용했지만, 이번에는 블란쳇의 제안으로 극작가 제러미 오 해리스가 각색한 텍스트를 사용했다.


현대 미국의 이슈가 투영된 도발적인 텍스트였다. 미니애폴리스와 포틀랜드가 언급되고, F자 들어가는 험한 욕도 나온다.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에그몬트의 영웅적 서사위에, 무장한 ICE에 저항하며 자유와 정의를 외치는 미국인들의 목소리를 얹은 느낌이었다. 베토벤의 정신을 거칠게 끌어올렸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공연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케이트 블란쳇의 내레이션은 어찌나 강렬하고 카리스마 넘치던지, 전체 공연을 압도했다. 스테이지의 앞과 뒤와 옆과 꼭대기에서 무대를 통째로 호령하며 에그몬트의 탄식을 들려주는 멋진 연기는 경이 그 자체였다.

한편, 이날 세계 초연된 ‘훔볼트의 자연’은 베네수엘라에 관한 음악이었다. 베네수엘라 출신의 지휘자가 베네수엘라 작곡가에게 위촉하여 베네수엘라의 자연을 노래한 음악. 그런데 바로 그 베네수엘라가 올해 초 미국에게 어떤 일을 당했는가. 클래식음악 연주회도 때로는 정치적 표현이 될 수 있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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