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 항일 저항시인으로 흔히 한용운, 심훈, 이육사, 윤동주 이 네 분을 꼽는다. 더 꼽는다면 이상화, 조명희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네 분 중 윤동주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이견이 존재하는 줄 안다.(‘윤동주는 저항시인인가?’- 논자 오세영 참조바람)
광복절을 맞아 대표적 저항시 몇 편을 골라보았다. 지면관계로 해설이나 저자 약력은 생략한다.
# <절명시(絶命詩)> 매천 황현(1855~1910)
“어지러운 세상에 떠밀려 백발의 나이에 이르도록(亂離滾到白頭年)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다가 이루지 못했네.(幾合捐生却未然) 이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으니(今日眞成無可奈) 바람 앞 가물거리는 촛불 푸른 하늘 비추누나.(輝輝風燭照蒼天) (중략) 새 짐승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시름거리니(鳥獸哀鳴海岳嚬) 무궁화 세상은 다 망하고 말았네.(槿花世界已沈淪)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역사를 돌이켜보니(秋燈掩卷懷千古) 글 아는 사람 구실 어렵기만 하구나.(難作人間識字人)” (< 매천집[梅天集]>1911)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를 맞아 한시(漢詩) 칠언절구 <절명시> 4편을 남기고서 음독 자결하셨다.
# <당신을 보았습니다> 만해 한용운(1870~1944)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중략)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主人)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중략)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민적 없는 자(者)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凌辱)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그를 항거(抗拒)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激憤)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하략) (<님의 침묵>1926)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앞장 선 분이다. 총독부를 등지고 단식하다 입적(入寂)하셨다.
# <절정(絶頂)> 이육사(1904~ 1944)
마츰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서리빨 칼날진 그우에서다/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문장(文章)1940>
독립운동을 하다 17차례나 투옥되었다가 옥사했다. 수인번호(囚人番號)가 64인지라 그 음을 취하여 육사(陸史)로 아호를 삼았다.
# <그날이 오면> 심훈(1901 ~ 1936)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두 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던/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 “(1930작<그날이 오면>1949출간)
심훈은 소설가로 더 알려져있지만, 이 단 한편의 시로 불멸의 시인이 되었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편지>, 이육사의 또다른 시들 <청포도>, <광야>,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그리고 김소월의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모습 대일 땅이 있었다면>, 조명희의 <짓밟힌 고려>라는 시들을 이 기회에 한 번쯤 꺼내 읽으며 광복에 힘쓰신 선열들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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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렬/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