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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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마주하는 소소한 일들

2022-11-13 (일) 09:43:53 윤영순 /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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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곡백과가 무르익는 풍요로운 이 계절에 한 여름 더위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무언가를 찾아 움직여야지 하는데 마침 며느리 한테서 갑작스럽게 전화가 왔다. “어머님, 일주일에 몇 번 저희 집에 오셔서 아이들 등·하교 시간에 맞춰 스쿨버스가 골목 어귀에 도착하면 데려가고, 데려오게 시간 좀 내어 주세요.”라고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본듯 할 일을 정해준다.

며느리도 지금껏 아이들 키우는 일에 치중하다 보니, 그동안 자신의 장래 발전을 위해 미루어 두었던 일을 찾아서 취업을 한 모양이다. 우리 세대 같으면 현모양처라고 집에서 가사 일과 아이들 양육을 최우선시 했던 시절과 달리 지금의 고학력 여성들은 그들의 재능을 사장시키지 않고 사회가 취업을 권장하는 세상이다. 도울 수 있을 때 도와야지 하며, 얼른 “그러마”라고 답해 주었다.

사계절 가운데서도 가장 이상적인 이즈음 일주일 내내 할 일이 잡혀있다는 것도 우리 같은 노인들에게는 축복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의 말처럼 일생에서 30년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살았고, 그 뒤 30년은 가족을 위해 살았다면, 나머지 세월은 자신을 위해 후회 없는 삶을 살라고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다. 6.25세대라면 “잘 살아보세”라는 캐치프레이즈 속에서 은연중에 몸에 배인 근검절약정신 때문에 저축이라면 당연시 했던 결과가 오늘날 그나마 평온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던 코로나-19의 무서운 기세도 이제는 마치 유행성 감기처럼 스치고 지나 갈 듯, 사람들은 장소 불문하고 스스로 알아서 마스크를 착용할 정도로 완화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안심하기에는 이른 듯 직장인들의 재택근무로 인하여 평소보다 교통량이 감소한 것 역시 집 앞에 주차되어 있는 움직이지 않는 차량 숫자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손녀들 등·하교를 돕기 위해 아들집을 들락일 때마다 알게 모르게 흘러가는 세월 앞에 아이들과 때로는 높은 산 같은 세대 차이를 느끼게 됨은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나 할까? 큰 손녀는 요즈음 할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책 읽기를 좋아해, 해리 포터 전집을 탐독하면서 곧잘 우리에게도 낭랑한 목소리로 낭송해 준다. 나 홀로 PC앞에서 게임에 열중하는 여느 아이들과는 달리 공기놀이랑 고무줄놀이, 블록 쌓기, 땅 따먹기 등등 다소 생소한 여자 아이들만의 놀이를 할머니와 손녀가 같이 즐긴다는 것은 정서적인 추억 쌓기에는 더 없이 귀중한 시간이 되고 있다.

오늘도 퇴근하듯이 아들 집을 나서는데, 배웅나온 아들이 등 뒤에서 “어머니, 이번 주 일요일 저녁에는 메리웨더(Merriweather) 공연장에서 음악회가 열린답니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클래식 연주를 우리 식구들 모두 구경 가요”라고 한다. 어쩌면 삶을 채우는 것들은 평범하고 소소한 일들이란 것을 평소에도 자주 느껴왔지만 일상이란 이런 것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온통 붉은 석양 노을이 초겨울 저녁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문득 메리 R. 힛트만의 시가 떠오른다.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 위대한 희생이나 의무가 아닌 미소와 위로의 한 마디가 우리 삶을 아름다움으로 채우네….”

<윤영순 /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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