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 페어팩스, VA
7월, 여름이 짙어간다. 여름 문턱에 들어선 지난달부터 이미 몇 차례나 냉면집을 드나들었다. 다사다난, 얽히고설킨 세상사에 매달려 갈등할 때마다 한 그릇의 냉면이 평온의 쉼표를 불러준다.
한여름 염제(炎帝)가 맹위를 떨칠 때 한 그릇의 냉면은 신선한 감촉과 더불어 한 순간에 과거와 현재의 온갖 상념들로 가득한 뇌리에 휴식을 제공한다. 어떻게 우리 민족은 한여름 냉면이라는 기발한 발상으로 이 순간에 나도 냉면을 풍미하고 있는 건지 탄성을 금할 수가 없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음식사전에도 냉면은 없다. 병균이 활성화하여 상한 것을 극도로 조심하는 계절, 얼린 국수를 즐겨 먹다니 이거야말로 갈채 받을 만한 최고 품격의 메뉴가 아니란 말인가.
냉면은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849년 홍석모의 저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우리나라의 세시풍속들에 대해 기록한 책에서 고려시대 평양의 찬샘골에 달세라는 사위가 메밀반죽을 국수틀에 넣어 국수를 만들어 찬물에 헹구어 먹은 것이 장안에 까지 퍼져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원래 냉면 육수는 산꿩고기 삶은 국물을 일등품으로 쳤다. 산꿩이 어디 그리 흔한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최근에는 사육꿩으로 대신하거나 닭고기, 소고기, 심지어 돼지고기를 삶아 국물을 내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 냉면은 저마다 다른 맛이지만 전혀 거부감을 느낄 수 없는 높은 격조가 자랑이다.
냉면은 음력 11월에 먹는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세월을 따라 이제는 사계절 어느 때 먹어도 어울리는 고상한 음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에 온 화교들이 우리 것을 모방하여 만든 중국식 냉면은 함부로 풀어넣은 겨자와 양파, 춘장을 반찬으로 내놓는 수준이라 비교가 안 된다. 일본의 모리소바(메밀국수)는 삶은 메밀 맛에 와사비(겨자), 갈은 무(horseradish) 맛간장 소스에 찍어 먹는 단맛, 톡 쏘는 맛 이외에 먹는 순간이 지나면 깊은 맛이 전혀 없다.
우리 냉면은 보라. 우수한 육수에 메밀국수를 넣고 편육, 삶은 계란, 배 또는 사과 과일과 무우김치 혹은 배추김치를 썰어 넣고 잣과 호두 또는 지방에 따라 다시마와 미역을 대신하여 단백질, 탄수화물 영양분 요소를 완벽하게 갖춘 음식이다.
150여 가지의 면류(국수)를 만들어 먹는다고 자랑하는 중국, 몽골과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가 전했다는 스파게티 파스타를 대표음식으로 내세우는 이탈리아, 기껏 면발 굵은 가끼우동이나 나베우동(냄비우동)이나 앞세우는 일본인들에게 우리는 냉면 한가지만으로도 너끈히 이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것 같다. 물론 우리에겐 냉면 이외에도 밀 반죽을 직접 도마 위에 방망이로 밀어서 잘라내 만든 다양한 형태의 칼국수나 수제비 그리고 쌀국수, 보리국수 등 특미의 면류가 얼마든지 있다.
평양냉면 이외에도 함흥냉면은 원래 홍어회를 얹거나 명태를 얹기도 하고 잘 익은 김치와 함께 여러 종류의 다대기로 맛을 내는 것이 보통이다. 옛 선비들이 즐겨 먹었다던 다소 온화한 맛의 진주냉면도 있다. 드물기는 하지만 조밥을 버무려 삭힌 가자미 식해를 얹어 먹는 북청냉면도 별미이다.
냉면이 자랑스러운 것은 빈부귀천, 남녀노소, 성별, 신분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대중성이다.
북한의 ‘평양 랭면'은 남북 외교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갖가지 화제 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재료부족 탓인지 서울냉면보다 맛이 단조롭고 투박하다는 게 냉면을 맛보고 돌아온 사람들의 평가다.
나는 한반도 통일문제나 남북 평화 소통에 냉면을 상징적 음식으로 정한다면 어떨까, 그런 공상을 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엉뚱하게도 세르반테스(16세기)의 돈키호테를 연결 짓는 상상으로 쓴 웃음을 지은 적도 있다. 저자 세르반테스가 냉면 맛을 알았더라면 돈키호테에 앞서 냉면을 소재로 세계 전 인류에게 불평등과 사회모순을 풍자, 고발하는 메시지를 남기는 소설을 썼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공상에 취할 때도 있다.
한국 냉면, 그 진미를 뜻으로 규명해 보자면 고차원의 철학과 빈부격차·신분 평등사상이 내재되었다고 비약시켜볼 소지도 있을 것만 같은 공상이 계속 남는다. 한국정가, 언제부터인가 싸움 좀 그만 하자며 회식 메뉴로 냉면을 먹는다던데 재미있는 광경이다. (571)326-6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