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외설에 관한 법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관점을 바꿔”

2022-07-08 (금) 글 박흥진 한국일보 편집위원 / 할리웃 외신 기자 협회(HFPA)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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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진의 Hollywood Interview

“외설에 관한 법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관점을 바꿔”

‘디프 스로트’(Deep Throat)의 개봉 50주년 다미아노의 아들 제라드 다미아노 주니어·딸 크리스타 다미아노

올해는 미 성인영화 산업 탄생의 초석이 된 ‘디프 스로트’(Deep Throat)의 개봉 50주년이 되는 해다. 제라드 다미아노가 린다 러브레이스(본명 린다 보어맨)를 주연 여배우로 기용해 각본을 쓰고 감독을 한 이 영화는 미 포르노영화 황금기(1969-1984)의 전령 구실을 했다. 포르노영화로선 최초로 영화로서의 내용과 인물 개발 및 모양새를 제대로 갖춘 첫 장편 극영화로 일반 대중을 상대로 일반 극장에서 상영돼 빅 히트를 했다(6억 달러 수입).‘디프 스로트’는 개봉 50주년을 기념,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각 지역에서 재개봉 된다. 한편‘디프 스로트’는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파헤친 워싱턴 포스트 기자 중 한 명인 밥 우드워드에게 정보를 제공한 정보원의 암호명이기도 한데 이 정보원은 후에 미 연방 수사국(FBI)의 전 부국장 마크 펠트로 밝혀졌다.‘디프 스로트’ 개봉 50주년을 맞아 부친의 영화들을 소유하고 있는 다미아노 영화사의 공동 사장인 다미아노의 아들 제라드 다미아노 주니어와 딸 크리스타 다미아노를 영상 인터뷰 했다. 두 사람은 뉴욕의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했는데 대답은 주로 다미아노 주니어가 했다.

“외설에 관한 법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관점을 바꿔”

‘디프 스로트’의 한 장면



-아버지와 그의 영화제작에 얼마나 가까이 관계 했는가.


“우리는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한 집에서 살면서 매우 가깝게 지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영화제작자라는 것을 알면서 컸다. 아버지는 자기 일에 대해 우리에게 숨기지 않았는데 그래서 세트와 촬영현장에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그리고 배우들과 제작진들이 끊임없이 우리 집에 드나들어 그들과 한 가족처럼 지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가 하는 일이 자랑스러웠지만 결코 그의 영화와는 관계하지 않았다. 영화 촬영이 시작되면 어머니가 우리를 현장에서 데리고 나갔다. 그러나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세트에서 아버지의 열정에 동참했었다.”(다미아노 주니어)

-무엇 때문에 이 영화가 포르노영화의 금자탑으로 여겨지는가.

“이 영화는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아직도 영화사상 가장 큰 수익을 올린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개봉 당시 논란거리가 됐던 주제들은 지금도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이 영화는 사람들의 외설에 관한 법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관점을 바꿔 놓았다. 아버지는 이 영화로 인해 체포되고 또 검찰에 의해 기소되자 아직도 검열이라는 구태의연하고 위선적인 방식에 의해 인간의 매우 건전하고 자연적인 본능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것에 매우 놀라워했다. 이 영화의 중요한 구실 중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과 성적 욕망 특히 여성의 성적 욕망에 관해 얘기하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여성의 음핵이 목구멍 안에 있다는 영화의 내용을 황당무계 하다고들 했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은 음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내용이 사람들에 의해 화제 거리가 되면서 사람들이 극장으로 몰려들었고 특히 그 전까지만 해도 포르노극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많은 여자들까지 극장을 찾았다. 데이트 족들도 극장을 찾으면서 ‘디프 스로트’를 안 보면 멋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당했다. 이제 영화의 개봉 50주년을 맞아 개봉 당시 논란이 됐던 주제들을 다시 한 번 논의해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다미아노 주니어)

-당신들의 아버지가 영화를 만들 때 카메라와 조명과 음악을 비롯해 기술적인 면에 대해서도 신경을 썼는지.

“아버지는 예술가였다. 그는 자기 영화에 예술적 성질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그는 조명과 음악 같은 것에 대해서도 신경을 썼는데 그래서 영화를 위해서 특별히 음악도 작곡했다. 아버지는 포르노영화라기 보다 무언가 예술적 작품을 보여주려고 했다.”(크리스타)

“지난 세기 이래 포르노영화는 영화 제작의 기술적인 부분에 혁신을 일으킨 업적을 남겼다. 토마스 에디슨의 ‘키스’가 그 한 예로 이 것도 포르노영화와는 관계가 멀면서도 당시엔 스캔들을 일으켰었다. 요즘에는 인터넷의 발달로 사람들이 동영상으로 추한 사진들을 서로 나눠 보고 있다. 영화의 기술은 이렇게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발전돼왔다. 나의 아버지로 말하자면 그는 늘 보다 좋은 영화를 만드는데 열심이어서 영화를 만들 때 제작진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았다. 아버지는 특히 ‘디프 스로트’를 찍은 촬영 감독 호아오 페르난데스와 함께 영화를 어떻게 하면 보다 멋진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지를 논의했는데 페르난데스는 아버지가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조안나의 이야기’와 ‘미스 존스 안의 악마’를 비롯해 여러 편의 영화를 찍었다. 그는 할리우드의 촬영감독 못지않은 사람이었다.”(다미아노 주니어)

-‘디프 스로트’를 미 의회 도서관 소속 전미 영화 등록부에 이름을 올리려고 추진 중이라고 들었는데.


“전미 영화 등록부는 매년 25편의 영화를 소장품으로 선정하고 있다. 미국 시민이면 누구나 다 추천할 수 있는데 50편의 영화를 추천하면 그 중에서 최종 25편을 고른다. ‘애봇과 코스텔로 프랑켄스타인을 만나다’와 같은 코미디도 올랐지만 지금까지 여기에 오른 성인영화는 단 한 편도 없다. 소장품으로 선정 되려면 예술적 가치와 함께 미 문화와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야 하는데 ‘디프 스로트’야 말로 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어서 소장품으로 선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영화를 등록부에 이름을 올리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하고 있다.”(다미아노 주니어)

-영화에는 유머가 많은데 아버지가 유머는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이었나.

“아버지는 매우 우스웠던 사람으로 매사를 가볍게 여기려고 했다. 농담 꾼으로 사람들을 웃기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호감을 쉽게 샀다. 이 영화가 인기가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도 바로 이 유머 탓이다. 유머가 영화를 보다 재미있고 우습게 만든 것이다.”(크리스타)

“아버지는 매우 고약한 유머 감각이 있었다. 그만의 독특한 유머 용어를 지녀 우리는 그 것을 ‘아버지의 유머’라고 불렀다. ‘디프 스로트’를 만들면서도 가볍게 만들어 자기가 보고 웃으려고 한 것이다. 아버지가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는 린다를 만나 그로부터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린다의 재능 뿐 아니라 그의 순진성에 매료당했다. 린다는 자연미를 갖춘 사람으로 꾸밈이 없는 이웃집 여자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린다를 만난 주말에 각본을 완성하고 다음 주 초에 제작비를 댈 사람들에게 영화를 만들겠다고 말해 승낙을 받았다. 그런데 돈을 댈 사람들은 처음에는 린다가 포르노 스타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지 않아 주저 했었지만 아버지의 설득이 주효해 영화 제작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포르노 스타라는 말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외설영화는 뉴욕 맨해탄 42번가에 있는 극장에서 8mm 필름으로 찍은 짧은 무성 필름을 돌리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아버지의 영화가 내용을 지닌 첫 장편 영화로 상영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이다.”(다미아노 주니어)

-‘디프 스로트’같은 영화가 요즘 같은 사회 환경에서도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는지.

“아버지는 이 영화를 만들기 전부터 강력한 표현의 자유 옹호자요 검열제도의 반대자였다. 이 영화 이전의 영화에서도 성의 혁명과 성의 개념에 대한 사람들의 변화를 기록하려고 했다. 아버지는 이 영화가 그렇게 폭풍적인 인기를 얻은 영화가 되리라고 생각하질 않아 그 반응에 놀랐을 뿐이다. 아버지는 성인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자의로 선택하게 내버려 둔다면 포르노영화가 뉴스거리가 되질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억압하고 또 그들의 선택권을 박탈 할 경우에만 포르노영화가 뉴스거리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디프 스로트’로 유명해지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최고의 영화를 만들려고 했을 뿐이다. 당시는 뉴스 매체의 수나 포르노영화의 시장이 좁아 저녁 뉴스에 나오는 영화면 모두가 다음 날 그 것을 보던 때였다. 그러나 요즘은 인터넷으로 온갖 내용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디프 스로트’ 같은 반향을 불러 올 영화를 만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성적으로 노골적인 것들을 볼 수 있는 수단이 수백만 가지가 있으니 말이다.”(다미아노 주니어)

-이 영화가 6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린 것이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축복이자 저주라고 생각한다. 영화에 돈을 댄 사람들이 악명 높은 마피아 콜롬보 일가였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범죄 집단과 계약을 맞은 것이다. 당시 싸구려 음란영화를 상영하는 극장들은 뉴욕 맨해탄의 타임스 스퀘어에 몰려 있었는데 그 극장들은 다 마피아의 것이었다. 마피아들도 이 영화가 그렇게 대성황을 이룰 줄 몰랐다가 억만금이 굴러들어오자 아버지에게 약소한 돈을 주고 영화 수익에서 제외 시켰다. 아버지는 그런 계약에 응하지 않았더라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영화가 번 떼돈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다미아노 주니어)

<글 박흥진 한국일보 편집위원 / 할리웃 외신 기자 협회(HFPA)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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