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며, 느끼며 -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2022-05-13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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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영화배우 강수연(1966~2022)이 56세 나이에 뇌출혈로 별세했다. 강수연은 69년 아역배우로 시작하여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 영화 선두그룹에서 활동했다.

‘고래사냥2’ (1985),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1987) 등에서 청춘 여배우의 대명사로 활약하던 그녀는 1987년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수상했다. 한국배우 최초로 세계3대 영화제 칸, 베를린, 베니스에서 상을 타며 이후 월드스타로 불렸다.

영화 ‘씨받이’로 각종 상을 수상한 당시, 강수연을 만난 적이 있다. 제5공화국이 물꼬를 터놓은 한국 대중문화의 성숙기인지라 여성월간지들의 인기도 대단했다. 한국에 있던 시절, 여성지 베테랑 기자로 표지담당을 했었다.


당시 유지인, 장미희, 원미경, 최명길, 황신혜, 김미숙, 전인화, 김희애 등의 영화배우나 탤런트, 그 해의 미스코리아들을 표지인물로 함께 촬영을 했었다. 매달 컨셉을 정해 모델을 섭외하고 헤어스타일, 메이크업, 의상, 액세서리를 준비할 뿐 아니라 촬영 당일 스튜디오 촬영의 진행을 맡고 기사작성을 하는 일이었다.

보통 명동 마샬 미용실, 헤어뉴스, 박준 미용실 등을 섭외하여 그곳에 모델을 보내 준비를 한 다음에 충무로 이용정 스튜디오, 김한용 스튜디오, 또는 여성지 지하 스튜디오 등에서 촬영했다.

강수연은 단골 미용실에서 머리와 화장을 하고 오겠다고 하여 명동에서 만났다. 그녀의 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같이 타고 서초동의 잡지사 스튜디오로 가야했다. 명동에서 남산1호 터널을 지나 한남동에서 서초동까지 가자면 트래픽이 심했다.

같은 차를 타고 아무런 대화 없이 장시간을 가자면 답답하고 지루하기짝이 없다. 보통은 모델들이 사근사근 대화를 이어가고 기자는 대답만 하는 쪽이었다.

그런데 강수연은 말이 없었다. 간단한 대화만 했는데 태도는 아주 공손했다. 한시간 이상 한 치 흐트럼 없이 꼿꼿이 앉아있는 것을 보고 ‘나이도 어린데 자기관리를 참 잘하는구나, 단단하네.’ 했었다.

촬영시 액세서리, 의상을 여러 번 갈아입고 촬영을 하는데 마지막에 강수연은 자기 진주귀걸이를 하고싶다고 했다. 결국 진주귀걸이를 한 사진이 표지로 선택되었다.

그녀의 뜻밖의 부음에 감독들은 물론 선후배들이 통큰 배우, 위대한 배우, 자신도 가장이면서 주위를 돌보고 베풀었다며 한결같은 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있다.


8일에는 김지하(1941~2022) 시인이 81세 나이로 타계했다. 김지하는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의 시인 김지하는 74년 민청학련 사건 가담, 75년 인혁당 사건 조작이라고 쓴 신문칼럼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학시절, 김지하의 시집은 지하로 숨었고 보는 것도 불법이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남몰래 복사본을 구해 읽고 나중에는 복사본을 필사하여 몰래 읽고 하던 시절이었다. 일부 신문은 그의 부고 소식을 전하면서 ‘변절자’ 수식어도 따라붙고 있다. 1991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청년들의 분신이 잇따르자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우라’는 글을 언론에 기고하면서부터였다.

강수연과 김지하의 연이은 부고에 호사유피(虎死留皮), 인사유명(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고사성어를 떠올린다.

사람은 한번 태어나 세상에 뜻있는 흔적을 남겨야 한다면 강수연은 당당하고 책임감 있게, 자신의 일에 충실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명예롭게 했다. 김지하는 오랜 세월 수감생활에서 얻은 병고와 상처로 잠시 오명을 얻은 적은 있어도 그는 여전히 독재정권에 맞선 1970년대 저항문학의 상징이다.

과연 우리들은 내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는가? 내 이름을 스스로 모욕하진 않았는가. 내 이름에 책임질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살아갈 날이 사는 날보다 짧아진 사람들은 긴장해야 한다. 내 이름을 빛나게 할 자, 욕되게 할 자, 모두 나라는 사실을.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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