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염세적 분위기가 자욱한 안개처럼 작품 전체를 감싸 안은 명작

2022-01-07 (금)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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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낀 부두’(Port of Shadows·1938) ★★★★½(5개 만점)

염세적 분위기가 자욱한 안개처럼 작품 전체를 감싸 안은 명작

숙명의 두 연인 장과 넬리는 불가능한 현실도피의 꿈을 꾼다.

1930년대 프랑스 영화계의 흐름이었던 시적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흑백명작으로 염세적 분위기가 자욱한 안개처럼 작품 전체를 감싸 안고 있다. 영화에는 시적 사실주의의 대표적 스타였던 얇은 입술에 과묵한 코주부 장 가방과 맑고 깊은 호심 같은 눈을 지녔던 미셸 모르강이 나오는데 둘의 사랑과 현실도피에의 동경이 아름답도록 절망적이다.

군모를 삐딱하게 쓴 탈영병 장(장 가방)이 안개가 자욱한 비 내리는 밤 지나가는 트럭을 세운다. 장을 태운 트럭은 항구도시 르 아브르로 가다가 도중에 길 잃은 개 키키를 주워 태운다. 장은 르 아브르에서 가짜 여권을 구해 베네수엘라로 튀어 새 인생을 살 셈이다.

장은 부두가의 싸구려 인간들이 드나드는 판잣집 술집에서 역시 현실에서 도주하려는 17세난 넬리(모르강)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장은 투명한 비옷에 베레모를 쓴 넬리에게 “당신은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오”라고 사랑의 언어를 건넨다. 그러나 인생 낙오자인 장과 저 세상 여자 같은 분위기를 지닌 넬리의 사랑은 처음부터 비극적 종말을 품고 있는 것.


장은 넬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그녀를 우리 속 짐승처럼 간직해온 늙은이 자벨(미셸 시몽)을 살해하고 배가 정박한 항구로 가다가 뒤쫓아 온 갱스터의 총에 맞아 죽는다. 키키가 장을 찾아 텅 빈 거리를 뛰어 달리는 마지막 장면이 가슴을 친다.

멋진 배우들과 촬영 그리고 음악과 함께 문학적인 것이 시인이자 각본가인 자크 프레베르의 각본. 감독은 마르셀 카르네. 영화는 철저한 염세적 분위기 때문에 나치 점령 하 프랑스의 괴뢰 정권 비시정부로부터 “프랑스가 전쟁에 진 것은 ‘안개 낀 부두’ 때문”이라는 엉뚱한 비판을 받으면서 상영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영화 평론가 앙드레 바장이 “우리 시대 영화의 비극적 영웅”이라 부른 장 가방은 로맨틱한 염세주의를 상징했던 프랑스영화의 동의어와 같은 배우였다. 그는 40여 년간의 배우생활 동안 ‘금괴에 손대지 마라’와 ‘지하실의 멜로디’와 같은 여러 편의 갱영화에도 나왔다.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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