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동행 속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된 이들의 러브스토리

2021-12-10 (금) 박흥진 편집위원 / 할리웃 외신 기자 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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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진의 Hollywood Interview - 핀란드 감독 유호 쿠오스마넨

동행 속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된 이들의 러브스토리

핀란드 감독 유호 쿠오스마넨

2021년 칸영화제 대상인 황금종려상(공동 수상)을 탄‘컴파트먼트 No.6'(Compartment No.6)를 연출하고 각본도 쓴 핀란드 감독 유호 쿠오스마넨(42)을 영상 인터뷰
했다. 로사 릭솜의 동명 소설이 원전인 영화는 모스크바에서 북극해 연안 도시 무르만스크로 가는 열차의 좁은 침대칸에 동승한 모스크바대의 핀란드 여자유학생
과 조야한 탄부의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그린 감동적인 드라마다. 이 영화는 핀란드가 2022년도 아카데미 국제 극영화상 후보로 출품, 한국의 모’ 가디슈‘와 상을 놓
고 경쟁하게 됐다. 쿠오스마넨은 질문에 심사숙고하면서 차분하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동행 속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된 이들의 러브스토리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컴파트먼트 No.6’(Compartment No.6) 영상 캡쳐.



-왜 영화의 원전인 소설의 시간대와 장소를 바꿨는가.


“소설의 무대는 시베리아 대륙횡단 열차이며 시간대는 소련이 아직 공산국가이던 1980년대이다. 우선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영화의 주제는 시간과 장소와는 관계없는 두 인간 간의 관계라는 점이다. 장소를 바꾼 이유는 2년 동안 촬영할 곳을 물색하다가 모스크바에서 무르만스크로 달리는 열차 노선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 노선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 노선보다 영화 내용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를 1980년대에서 1990년대 말로 바꾼 것은 모스크바-무르만스크행 열차가 가다가 정차하는 장소들이 아직도 199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를 유지하려면 세트를 지어야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두 사람 간의 관계에 얘기의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했는데 이런 인간관계는 소련공산주의 시절이었다면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것도 시간대를 바꾼 이유 중 하나다.”

-소설의 어느 점이 마음에 들어 영화로 만들기로 했는지.

“소설을 읽으면서 짙은 향수를 느꼈다. 마치 누군가의 기억 속을 걷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그리고 나도 영화 속 두 인물처럼 과거에 타인과의 아름다운 짧은 만남을 한 적이 여럿 있다. 그들의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모습은 기억하고 있는데 그들과의 짧았던 만남은 아직도 내게 따스하고 깊은 인상을 남겨놓고 있다. 그리고 열차 안의 빠져 나올 수 없는 좁은 공간에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서로가 서로를 향해 다가갈 수 밖에 없다. 상대방이 서서히 당신의 한 부분으로 변화하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인간은 서로를 갈라놓는 다른 점보다 유사한 점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 나는 기차여행을 무척 사랑해 소설을 보면서 흥분에 들떴던 기억이 난다. 이런 점들이 마음에 들었다.”

-진짜로 달리는 열차 안에서 찍었는가.

“밤 장면을 빼고는 모두 세인트 페테르스부르크 인근을 달리는 열차 안에서 찍었다. 침대칸의 협소함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칸 안에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 촬영했다. 그런데 영화 내내 열차 안에서만 얘기가 진행된다면 너무 답답할 것을 염려해 열차가 장시간 머무는 동안 열차 밖 역과 플래트홈에서도 찍었다. 이 것도 소설과 다른 점이다.”

-두 주인공 간의 조화가 좋은데 그들은 어떻게 선정했는지.

“여 주인공 라우라로 나오는 사이디 할라는 핀란드 배우로 촬영 1년 반 전에 골랐다. 일찌감치 사이디와 함께 각본을 읽으면서 라우라라는 여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 둘이 그 여자를 같이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남자 주인공인 료하역을 할 러시아 배우를 고르기는 매우 힘들었다. 영화와 달리 소설 속 료하의 나이는 50대였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라우라가 료하를 보고 느낀 첫 인상을 강조했는데 따라서 우리도 이런 남자배우를 찾으려고 신경을 썼다. 그래서 연기 잘 하는 여러 명의 러시아배우들과 사이디를 짝으로 리허설을 했지만 도무지 둘 간에 화학작용이 일어나질 않았다. 그러다가‘불’(The Bull)이라는 영화에 나온 유리 보리소프를 보고 그의 연기에 감탄, 사이디와 함께 몇 장면을 찍었는데 그 즉시 둘 사이에 오묘한 화학작용이 있음을 깨닫고 그를 선택한 것이다. 라우라와 료하는 처음에는 신분의 차이로 거리감을 느끼나 차차 선입관을 벗어난 인간이 되면서 서로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남매의 얘기라고 해도 되겠는데 실은 두 영혼의 반려자의 얘기다. 영화는 전적으로 이 두 배우의 연기와 능력에 의존하고 하고 있다.”


-영화는 다국적영화인데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함께 만들면서 무슨 어려운 점이라도 있었는가.

“영화는 핀란드, 러시아, 에스토니아 및 독일 합작품이다. 그래서 각본도 에스토니아 작가와 함께 썼고 특히 대사는 러시아 작가와 함께 썼다. 영화의 두 주인공이 각기 다른 나라 사람인 것처럼 영화를 만든 사람들도 이렇게 각기 다른 나라 사람이라는 점이 좋았다. 러시아에서 영화 찍기가 힘들 것이라는 말과는 달리 열차도 쉽게 빌릴 수 있었고 또 실제 열차 노선에서 촬영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네 나라의 과거 역사가 어두운 점이 많았기 때문에 촬영현장에서는 이를 놓고 짓궂은 농담들이 많이 오갔다. 한 두 세대 전만해도 우린 서로를 증오하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에 살고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꼈다.”

-영화는 일종의 로드 무비인데 영화를 만들면서 과거 어느 로드 무비로부터 영감을 받기라도 했는지.

“나는 로드 무비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로드 무비들처럼 플롯이 간단한 영화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로드 무비보다는 열차 영화들을 생각했다. 대부분 로드 무비는 차를 타고 가는데 차를 타고 갈 때는 갈 곳이나 가다가 내릴 때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열차 영화는 그럴 자유가 없다는 점이 둘의 차이다. 열차 안에서는 자유로운 선택권이 없는 대신 있는 그대로를 수용해 그 것과 대면해야 한다. 영화를 찍기 전에 열차 영화들을 많이 봤지만 그러다간 그 영화들을 모방할 것이 두려워 열차 영화보다는 두 사람 간의 강한 감정을 다룬 빌 머리와 스칼렛 조핸슨이 나온‘로스트 인 트랜스레이션’ 같은 영화를 참조했다. 로맨틱 러브 스토리이지만 이성 간의 러브 스토리가 아닌 남매간의 사랑 또는 그와 유사한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영화를 만들면서 배우들과 함께 영화에 대해 상의하는가 아니면 당신 자신의 의견대로 만드는가.

“우리는 리허설에 의존하기보다 함께 각본을 읽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이유는 나는 영화를 찍기 전만해도 두 주인공 역을 한 배우들에 관해 몰랐기 때문이다. 배우들과 일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 함께 영화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 화면 위의 영화란 결코 감독의 머리 안에서 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함께 나눠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영화 뿐 아니라 다른 문제들과 우리들의 경험 등 여러 가지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이 토론했다. 영화란 감독과 배우들 간의 공통된 이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배우들과 대화를 나눴는가.

“사랑에 관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우리가 논의한 것은 추상적인 감정으로 사랑이 관여된 인간 간의 연결이었다. 사랑에 관한 비좁은 개념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색스를 하고 싶고 결혼하거나 상대방을 소유하고 싶다는 것인데 우리는 이런 상투적인 것을 피하려고 했다. 우리가 보여주고픈 사랑은 상대로부터 아무 희망도 바랄 수 없는 순수한 것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대와 다른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그 것이 사랑인지 또는 연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는 라우라와 료하 간의 감정이 우정인지 또는 사랑인지 모르게 끝나는데.

“나도 모르겠다. 둘의 러브 스토리의 핵심은 둘이 무르만스크의 눈벌판 위에서 하는 몸씨름 장면 안에 있다고 하겠다. 둘은 국적과 자기들의 역할 그리고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으로부터 해방된 채 아이들처럼 눈 속에서 놀고 있는데 바로 이 것이 둘의 러브 스토리의 완성이라고 하겠다. 둘은 그 순간의 기억을 간직한 채 서로가 그 기억 속에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박흥진 편집위원 / 할리웃 외신 기자 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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