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선객들은 긴긴 동짓날 밤잠이 오지 않아도 괴롭지가 않다. 열차를 기다리는 때는 물론이고 장시간 열차나 버스 여행을 할 때도 전혀 지루함을 모른다. 깊은 산속 조그마한 토굴에 있어도 외롭지 않다. 왜냐하면 화두라는 애인이 항상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뜨기 전에 내 애인을 챙기고 단속한다. 하루 종일 그와 함께 가고 오고, 밥 먹고, 차 마시고, 옷을 입는다. 분주한 곳에서 허둥대거나 남들과 이야기하고 잡담할 때는 애인이 토라져서 멀어지기 때문에 되도록 조용한 곳에 혼자 있으려고 하면서 애인을 챙기고 또 챙긴다...이 애인만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나와 더불어 저승길에 함께 할 것이요, 오히려 내 앞길을 바른길로 인도할 것이다...”
대현 스님은 2010년 봄 부처님오신날 즈음에 펴낸 수행기 ‘선승의 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전에도 그 뒤로도 스님은 늘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몸소 행했다. 1947년 광주에서 태어나 1968년 장성 백양사로 출가한 수계한 대현 스님은 1975년 인천 용화사 안거를 비롯해 2010년 그 즈음까지 50안거를 성만했다. 선승의 길 이외에도 그는 2016년 초 간화선과 위빠사나를 조합한 선수행안내서 ‘위빠간화선’을, 2017년 초 우리민요 아리랑이 조선 중기 진묵 대사에서 유래하는 깨달음의 후렴구(아는 참나, 리는 버림, 랑은 거짓나)라며 아리랑이 깨침의 노래로 온누리에 울려퍼지기를 발원하는 내용의 ‘깨침아리랑’을 펴냈다. 2018년 가을 LA 반야사에 한달가량 머물 때 아리랑 주문을 외거나 가르쳐 화제가 됐다.
코로나 괴질이 덮친 2020년, 지리산 정각사 죽림선원에서 수행중이던 대현 스님은 만성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치료하지 않으면 2,3년밖에 살지 못한다는데 스님은 치료를 거부했다.
“...지금 내 나이는 칠순이 훨씬 지났습니다. 백세까지 사는 세상이니 한참 못 미치는 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본래 약골로 태어난 나로서는 많이 산 것입니다. 그리고 절집에 들어온 지도 반백년이 지났습니다. 시은만 지고 있어 무거운 업만 쌓여 가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 면역력이 떨어져 일년 내내 감기 기운이 떨어지지 않고 콧물이 줄줄 흘러내리며 가래가 목구멍에 걸리어 괴롭고 기침이 심합니다. 이러한 증상들이 이제 이 세상을 하직하라는 메시지인 것 같습니다...”(유고집 ‘아름답게 가는 길’ 중에서)
오나가나 자나깨나 화두를 붙들고 수행하는 스님의 삶은 달라질 게 없었다. 그러나 스님의 몸은 갈수록 축났다. 올해 여름, 스님은 최후에 대비한 최후의 결심을 했다, 죽음을 기다리지 말고 죽음에 다가가기로. 영정사진과 수의까지 손수 준비해둔 스님은 8월35일 곡기를 끊었다.
“...초학 시절 보름 동안 단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단식을 하면서 열심히 정진을 하였더니 정신이 맑아져 화두가 성성적적 끊어짐이 없이 밤낮 이어짐을 체득한 바가 있습니다. 그때 생각하기를, 이 세상 떠날 때 단식을 하면서 가는 것이 좋겠구나!...백 년 이백 년 더 살다 간다고 해도 아쉽기는 매 한 가지입니다. 지금 더 살려고 버둥댄다면 그것은 생에 대한 애착 때문입니다. 생에 대한 애착은 윤회의 씨앗이 됩니다. 나는 그 윤회의 씨앗인 애착을 버리고자 합니다. 좀 힘이 남아 있고 정신이 또렷할 때 단식을 하면서 마지막 정진을 하고자 합니다...” (유고집 ‘아름답게 가는 길’ 중에서)
단식 29일째인 9월 22일 오후 3시쯤(한국기준), 스님은 열반에 들었다. 몇 줌도 안되는 스님의 육신(키 160cm 미만, 몸무게 20kg 안팎)은 타오르는 장작더미 위에서 한 줌도 안되는 재로 변했다.
그러나 스님의 가르침은 타지 않았다. 타지 않고 남아서 책이 됐다. 위에 두 차례 인용된 ‘아름답게 가는 길’(올리브나무 출판, 320쪽)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단식 기간에 죽을힘을 다해 써내려간 일기, 임종게를 포함한 고별사,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을 다룬 대반열반경에 대한 스님의 생각 등이 담긴 유고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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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