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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휘어잡은 청화 큰스님 사진

2021-09-23 (목) 법공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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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휘어잡은 청화 큰스님 사진
돌이켜 보면 기회는 참 많았다.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할 기회 말이다. 귀의는 아무래도 좀 거창한 것 같다. 그냥 초파일 불자라는 소리를 들을망정 절에 다니게 된 계제라 해도 좋겠다. 그런 기회들과 그런 계제들을 나는 무던히도 흘려버렸다, 마흔 훌쩍 넘어 미국에서 무릎을 꿇을 때까지.

어렸을 적 우리마을은 해남에서 강진으로 넘어가는 끝마을이었다. 대흥사가 자리잡은 두륜산의 뒷모습이 사시사철 보였고, 나무하러 다닐 때 수없이 올라다녔던 마을 뒤 무넘이재나 깃대봉에 오르면 백련사가 있는 만덕산이 지척이었다. 마을사람들은 대개 불교와 토속신앙이 뒤섞인 종교관을 가졌던 것 같다. 초파일이면 옆마을 뒷산 작은 절을 찾아, 말하자면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을 봉행하곤 했다. 나는 떡 얻어먹을 요량으로 한두번 따라갔던 기억이 새롭다. 그 시절에는 또 하루이틀이 멀다 하고 만행하는 스님들이 찾아와 목탁에 맞춰 불경을 외며 가가호호 돌았다. 쌀은 우리도 구경하기 힘든 때였으므로 대개 보리쌀 몇줌을 퍼주면 스님들은 다른 집으로 발길을 옮겼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부처님이 누구실까, 부처님 가르침은 무엇일까 호기심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밑도 끝도 없이 불교를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따라서 내가 ‘그런 기회들 그런 계제들’을 흘려버린 걸 지금 와서 아쉬운 듯 되짚는 건 아니다. 내 진정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건 있다. 원인 모를 고열과 오한, 기침과 두통 등 일년이면 두세번은 심하게 앓았고 그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죽음의 공포에 떨곤 했는데도 나는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에 매달릴 생각을 전혀 못했던 것이다.


중1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집에 자주 들렀던 보살님을 따라 대흥사에 가게 됐다. 보살님이 세든 대흥사 앞 민가에서 이틀인가 사흘인가 묵으면서 날마다 대흥사에 가 기도하고 말씀듣고 그랬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모르지만 보살님은 나를 아들로 삼겠다면서 내게 각별한 정성을 쏟았다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뒤로도 불교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고교 시절에는 우연히 손에 잡힌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이란 책을 읽은 뒤 1999년 종말론에 사로잡혀 꽤 오랫동안 살맛을 거의 잃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불교는 아니었다. 20대 초반 방황기를 거쳐 기자가 된 뒤로는 세상을 다 얻은 듯 불교는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흘러흘러 북가주에 정착한 2005년 어느 날. 땡볕에 축구경기를 하는데 우리팀 선수 한명이 쓰러졌다. 구급차를 불렀다. 그는 괜찮다며 병원행을 거부했다. 구급요원들은 발길을 돌렸다. 얼마 뒤 그는 다시 쓰러졌다. 그리고 일어나지 못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나는 몹시 착잡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다음날(일요일) 나는 카멜 삼보사를 찾았다. 그때 삼보사에 응접실에 걸린 대형사진 한 장이 산란했던 내 마음을 휘어잡았다. 깡마른 체구에 온화한 미소, 청화 스님 사진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차츰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에 무릎을 꿇기 시작해 어느덧 만 15년간 한국일보 불교면의 지킴이가 됐다.

<법공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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