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과학(7-2)] ‘수학도 출신 수행자’ 일묵 스님 법문(2)
2021-04-08 (목)
일묵 스님이 춘천에 세운 사성제 수행도량 제따와나선원
(과학처럼) 불교에도 검증 기준이 있다. 예를 들면 아라한이 되면 탐진치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인데 정말 탐진치가 없는지 어떤 죽음이 닥치거나 극한 상황에서도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는지 검증하는 수단이 있다. 이런 공부를 잘 안하고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서 검증을 안거치고 뭔가를 알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욕심이 있으니까, 깨달은 거를 빨리 스스로 인정하고 싶고 내세우고 싶으니까. 그래서 남한테 우쭐하는 허영심 외에 자기 괴로움이 진짜 없어지는 건 아니다. 부처님께서 어떤 문제를 정확히 인지하고 그 원인을 찾고 실제로 이것이 버려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통찰하고 버려질 수 있다면 어떻게 버릴 것인가 그 방법이 뭔가에 대해 이야기한 게 사성제다.
그럼 어떤 면에서 과학과 불교의 차이점이 있는가. 요즘 과학이 너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다보니 과학만능, 과학이 모든 걸 대변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학은 유용하지만 전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첫째는 프레임의 차이다. 어떤 현상을 통찰해서 그 본질을 파악하고 이론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비슷한데 그 현상을 통찰하는 기준이 뭐냐 경제학적 물리학적 수학적인 관점에서 하느냐 그 관점에 따라 거기서 얻어지는 결과도 달라질 수 있다. 이 관점을 견해라고 하기도 하고 프레임이라고 하기도 한다. 불교의 목적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그래서 과학을 하더라도 이것이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인가 괴로움을 줄 것인가 이런 거를 고민하게 된다. 이런 게 없으면 기술의 발전이나 과학의 발전이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좋은 의도로 했지만 과학의 성과로 핵무기가 만들어지고, 코로나 같은 바이러스를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반면 인간의 삶에 유익한가 아닌가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하는 게 불교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최상위 관점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과학에서는 이게 꼭 최고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대부분 과학자들은 훌륭한 사람들이지만 정치적으로 국가적으로 악용되는 사례들이 있다. 그런 것이 불교와 과학의 차이점의 하나다.
둘째는 과학은 주로 물질과 물질적 현상을 통찰의 대상으로 하는 반면 불교는 주로 마음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마음을 연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실험이 아니라 관찰이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통찰력을 가지고 관찰하는 방법밖에 없다. 심리학 같은 데서 어떤 표본을 만들어 수천명을 대상으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것은 관찰의 대상 자체가 외부다. 그래서는 다른 사람 마음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 사람이 거짓말할 수도 있고 잘못 말할 수도 있고 오류도 있을 수 있다. 불교수행에서 마음을 관찰할 때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마음을 관찰하기 때문에 자기수행이 좀 발전하면 굉장히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할 수 있다. 또 자기가 자기를 속이지 않는 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이게 위빠사나 수행의 중요한 부분이다. 마음을 바라보는 데는 불교가 다른 거에 비해 매우 우세하다. 이게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다.
과학은 한계가 있다. 뇌과학도 마음을 연구하는 데 도움은 되지만 그걸로 번뇌를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외부의 대상에 대한 연구와 자기 내부 마음의 괴로움을 없애는 것의 프레임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갭이 있다. 사실 과학자 중에 되게 괴팍한 사람이 많고 학문하는 사람들 중에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도 많다.
불교수행은 과학적인 방식으로 하면서도 관찰하는 대상이 주로 마음이다. 마당을 쓸든 밥을 짓든 길을 가든 뭘 하든 이 마음에서 번뇌가 있는 상태로 하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 외부의 대상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상을 보는 자기의 마음상태 이게 청정하냐 안하냐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하게 본다는 것이다.
<출처: 제따와나선원 유튜브영상, 요약정리-정태수 기자, 15일자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