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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모세에게 배운다

2020-12-25 (금)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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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금년을 헛살아 새해에 한살 더 먹지 않겠다고 너스레를 떤 친구가 있지만 놀랍게도 지구촌에서 올해 172만여명이 나이를 영영 더 먹을 수 없게 됐다. 너스레 아닌 비극이다. 실업자와 파산자들이 연일 쏟아진다. 학생들이 학교에 못 가고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못 간다. 결혼식, 졸업식, 장례식이 소꿉장난마냥 초라해졌다. 누구에게나 기억하기 싫어도 잊힐 수 없는 고약한 한해였다.

물론 도널드 트럼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새 대통령으로 당선된 조 바이든이나 사상최초로 한국에 오스카 작품상을 안겨준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 역시 한국인 최초로 미국의 빌보드 차트 1위를 석권한 보컬그룹 방탄소년단(BTS), 70미터 질주 ‘원더골’로 한국선수 최초로 FIFA의 푸슈카시 상을 받은 잉글랜드 토트넘 구단의 손흥민 선수 등은 2020년이 영원히 기억하고 싶고, 잊힐 수 없는 한해일 터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첫 달에 중국 우한에서 터진 금년은 카오스의 연속이었다. 트럼프의 탄핵소추가 연방의회에서 떠들썩하게 진행됐다. 세계보건기구(WHO)가 3월에 팬데믹을 선포한 후 식당 등 접객업소들이 문을 닫았고, 4월엔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가 ‘뉴 노멀’(새로운 일상)이 됐다. 트럼프는 한사코 마스크 쓰기를 거부했고, 미국은 확진자와 사망자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역 후진국이 됐다.


미니애폴리스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관의 무릎에 목이 깔려 숨진 5월부터 과격한 ‘BLM’(흑인생명 존중) 시위가 전국 대도시를 휩쓸며 방화와 약탈이 자행됐다. 올여름 산불도 유난히 우심해 캘리포니아에서만 400에이커가 소실됐다. 10월엔 트럼프가 코로나바이러스 확진판정을 받고 입원해 소동이 빚어졌다. 11월 대선에서 바이든이 뜻밖의 압승을 거뒀지만 트럼프는 아직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올해가 고약한 해이기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서울시장과 부산시장이 성추행에 연루돼 한쪽은 자살했고 한쪽은 사퇴했다. 한국 공무원을 북한군이 해상에서 공개적으로 총살한 후 사체를 소각했지만 정부는 입도 뻥끗 못했다. 현직 검찰총장을 쫓아내려는 두 법무장관의 대를 이은 ‘너 죽고 나 살기’식 무대뽀 갑질이 몇 달을 끌었다. ‘방역 선진국’이라던 자부심은 빛이 바랬고 백신확보 경쟁에선 낙제생이 됐다.

금년이 지겨웠고 헛산 것 같대서 새해에 나이를 안 먹을 수는 없다. 내 친구의 너스레는 나이 먹기 싫어하는 노인들의 객기이다. 립 반 윙클이 산에서 낮잠을 20년간 잤지만 아무도 그의 나이에서 20년을 공제하지 않았다. 치매로 오래 앓다가 죽은 사람도 그의 향년(享年)엔 정신 나간 채 산 기간이 포함된다. 노인들은 나이 먹는 것 자체보다 여생에 의미 없이 살아가는 기간이 길어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유엔이 2018년 발표한 각국의 기대수명은 일본이 84.74세로 1위, 한국이 83.31세로 2위이다. 미국은 78.25세로 한참 아래(48위)이다. 한국인들은 이미 오래전에 ‘인생 100세 시대’를 선언했다. 2040년엔 130세까지 살 거라는 보고서도 있다. 구약성경의 족장들은 수백년씩 살다가 노아 이후부터 대략 120세 아래로 줄었다. 복고추세인지 현대인의 수명이 4,000여년전 창세기 시대를 닮아가는 모습이 희한하다.

우리가 운 좋게(?) 100세를 살아도 창세기의 야곱에 비하면 중년이다. 그가 쌍둥이 형의 장자권을 훔친 후 불원천리 외삼촌 집으로 도망갔을 때 이미 ‘고희’를 넘긴 70대 중반이었다. 20년간 머슴살이를 하며 얻은 아들 12명 중 막내를 108세쯤에 나았다. 가장 총애했던 11번째 아들 요셉의 초청으로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있는 이집트에 가족이민을 떠난 것이 130세였다. 그 후 147세에 객지에서 눈을 감았다.

유대민족 최고 영웅인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다. 이집트에서 노예가 된 야곱 후손들을 430년만에 단일민족으로 묶어 해방시킨 후 40년에 걸쳐 조상 땅 가나안으로 역이민 시킨 주인공이다. 그도 죽기 직전 모든 백성을 모아놓고 하루 종일 연설할 정도로 팔팔했다. 프랑스 여성 잔 칼망은 122세까지 살았고 중국 한의사 이경원은 256세까지 살았다는 설이 있다. 둘 다 3,500여년 전 모세보다 장수했다.

노령인구가 늘어나면서 SNS엔 노인건강에 관한 정보가 넘친다. 흰 쥐의 해였던 올해 경자년은 경악의 해였지만 흰 소의 해인 신축년 새해엔 많은 사람이 팬데믹을 극복하고 소처럼 건강해지길 바라며 신년결의를 할 터이다. 야곱은 “참으로 험난한 세월을 살았다”고 회고했고, 모세는 “나이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한탄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인생의 후반부를 전반부보다 훨씬 의미 있게 살다가 갔다.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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