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의 이민생활 에피소드

2020-08-11 (화) 08:20:16 석은옥 / 페어팩스, VA
크게 작게

▶ 화가 복이 되어

나의 남편 강영우 박사는 15세에 축구공에 눈을 맞아 망막박리로 실명하고 부모도 없이 갖은 고난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름다운 인간천사들의 도움으로 1976년 4월,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대학에 유학할 수 있었다.
3년8개월 만에 한인 최초의 장애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아 한국과 미국 신문 및 방송에서 대서특필되었다. 당시 피츠버그 대학의 교육학과가 서울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어 박사학위를 따면 바로 모셔 갈 때라 우리도 곧 한국에 취직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아무 곳에서 연락이 없었다. 그 이유는 아직 한국에서는 시각장애인이 교수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되었다는 것이다. 본질적인 이유는 한국정서에 깔려있는 ‘아침에 장님 보면 하루 종일 재수 없다’는 그릇된 편견으로 일반인들이 시각장애인과 동료로 마주앉아 일하는 것이 불편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3살 된 큰아들과 막 태어난 2달된 둘째 등 4명의 식구가 로타리재단에서 매달 생활비로 주는 200달러로 살고 있었다. 90달러를 아파트 렌트비로 내고 남은 110달러로 살 때였는데 학교를 졸업하면서 학생 비자도 만료됐고 생활비도 받을수 없게 됐다. 미국도 한국도 갈 곳이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박사후과정(Post Doctoral) 프로그램에 들어가 우선 비자를 연장하고 미국에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수백 곳의 시각장애인 기관에 연락하여 마침내 1977년 1월부터 인디애나 주 개리 시 교육청에서 일할 수 있고 영주권도 해 준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우리 가족에게 뜻하지 않은 미국 이민의 길이 열렸다. 그 후 미국 대학 교수가 되고 첫 저서 ‘빛은 내 가슴에’와 영문판 ‘light in my heart’가 출간되고 여러 곳에 초청받아 강연하게 되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 등의 초청을 받으며 어느새 명사가 되어 미국 장애인 민권법에 서명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만나게 되었고, 그 후 아들 부시 대통령의 백악관 직속 장애인정책자문위원으로 임명을 받았다.
남편이 떠난 지 벌써 8년, 강영우 장학재단을 통해 시각장애인들을 도우면서 지난 이민생활을 되돌아보니 그때의 고난이 축복이었다.

<석은옥 / 페어팩스, VA>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