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은밀한‘박사방’과 함정수사

2020-05-06 (수) 손경락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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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끼 광고로 여성들을 유인하여 성착취 음란물을 제작하고 이를 온라인에 유포한 ‘n번방’에 이어 ‘박사방’ 사건 등으로 한국이 시끌벅적하다. 이들 성범죄 주동자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해외 암호화 메신저인 텔레그램을 범행에 이용하였으며 수시로 방을 바꿔가며 가상화폐로 유료회원을 모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 여성 중에는 미성년자들도 다수 포함돼있어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가공할 만한 것은 이런 류의 음란물 유통방 유료가입자가 무려 26만명에 이를 정도로 인터넷 성범죄가 한국사회에 만연해있지만 워낙 음성적으로 거래되는 데다 메신저 보안기술의 발달로 단속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의 해결책으로 미국처럼 함정수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성단체 중심으로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현행 한국법상 신분을 숨기고 범죄정보를 수집하는 잠입수사는 합법이지만 함정수사는 불법으로 재판에서 증거로 인정되지 않는다.

함정수사는 비밀 공간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디지털 성범죄를 비롯 마약, 도박, 밀수사범 등을 검거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에 미국에선 종종 사용하는 수사 방식이다. 가까운 예로 4월 24일자 폭스뉴스에 따르면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 경찰은 코로나19로 휴교중인 기간에 온라인 사이트에서 어린이로 가장하여 ‘코비드 단속 작전’(Operation COVID Crackdown)을 펼친 결과 함정수사에 나선 경찰관들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해 성관계를 요구한 성범죄자 30명을 약속장소에서 체포했다고 밝히고 이들의 신상을 공개했다.


하지만 함정수사가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때 뉴욕시경은 절도범죄를 줄이기 위해 사람이 붐비는 공원 같은 곳에 일부러 자전거나 유모차 등에 돈지갑을 걸어두고 이를 손댄 사람들을 검거하는 이른 바 ‘행운의 가방 작전’(Op eration Lucky Bag)을 전개한 적이 있었는데 주인에게 돌려줄 의도로 지갑을 주운 사람 3명까지 무분별 검거하는 바람에 이들에게 총 5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하고 작전을 완화한 사례가 있다. 또 2018년 시카고 경찰은 시카고의 한적한 흑인동네에 명품 운동화를 가득 실은 트럭을 방치한 뒤 운동화를 훔친 사람들을 체포하였는데 경찰이 애먼 흑인동네를 타겟으로 삼았다며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억울하게 함정수사에 걸려든 사람들을 위해 법원은 소위 ‘함정의 항변’(entrapment defense)으로 이들을 심판하게 된다. 함정의 항변은 피고인이 범의가 없었음에도 불구, 수사기관의 함정에 걸려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때 무죄가 되는 법리로 셔먼 대 미국(Sherman v. United States) 사건에서 판례가 확립되었다.

뉴욕의 마약중독자 조세프 셔먼은 헤로인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마약 금단증상 완화약물인 메타돈을 복용하고 있었는데 병원에서 만난 다른 중독자 칼치니안(Kalchin ian)과 서로 친해지게 되었다. 어느 날 칼치니안은 더이상 메타돈으로는 버틸 수 없겠다며 셔먼에게 마약을 구해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했고 셔먼은 마지못해 이 청을 들어주고야 말았다.

하지만 칼치니안은 이미 다른 범죄로 기소된 상태에서 검찰과의 유리한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을 얻어내기 위해 마약상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여기에 셔먼이 이용된 것이었다.
당시 연방대법원장 워렌 판사는 셔먼이 성실하게 약물치료 중이었고, 가택수색에서 마약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마약을 전달만 했지 이윤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 등을 이유로 원심을 뒤집고 무죄 판결을 내려주었다.

앞선 사건 등에서 보듯 성범죄를 소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단속하기 위한 함정수사는 여러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방법이 요구된다.

<손경락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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