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국민들은 살고 싶다

2020-04-16 (목) 채수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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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LA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17세 한인 소년이 의료보험이 없어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제대로 치료 한 번 못 받아보고 끝내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종일 마음이 아팠다. 세계 최강국이자ㅁ최고의 의료선진국이라는 미국이 열일곱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를 보험이 없다고 죽게 버려두다니…

1970년대 중반, 한국 직장에서 처음 의료보험증을 받아들었을 때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 손바닥 만한 두꺼운 종이를 반으로 접어 4면으로 만든 의료보험증은 앞뒤는 제목이 적힌 표지로 사용하고 내지 양면에는 가입자의 인적사항이 적혀있었다. 내지를 열면 증명사진이 풀로 붙여져 있었고 그 밑에 주민등록번호, 성명, 생년월일, 직장명, 주소 등 인적사항이 손글씨로 적혀있었다.

질박하고 조잡스럽기 까지 한 이 작은 카드 한 장이 한국을 현재와 같은 의료선진국으로 만드는 첫걸음이 되었다. 의료보험증은 주민등록증처럼 전국민 모두가 소지하고 있었으며 이 증서 한장이면 아플 때 언제든지 병원에 가서 저렴함 비용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보험료는 각자의 소득수준에 따라 일정액을 봉급에서 자동으로 납부하던가 동사무소에 가서 납부하도록 되어있었다.


의료보험 실시 이후 높기만 하던 병원 문턱이 낮아지자 사람들은 감기만 결려도 병원을 찾았으며 일반 병원은 물론 안과와 칫과병원, 한의원까지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전국민 보험제 실시로 병원을 찾는 환자 수가 급증하자 늘어나는 의료수요에 맞추기 위하여 대기업과 대학, 종교기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앞다투어 전국 곳곳에 대형병원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늘어나는 환자 수에 비해 의료진 또한 턱없이 부족했던 터라 의과대학은 정원을 늘렸으며 의대가 없던 여러 국공립 대학과 사립대학에 의과대학이 신설되었다. 의대는 과거 인기학과였던 법대와 경상계를 제치고 가장 경쟁율이 높은 학과로 부상하였으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머리좋은 사람들이 많이 가는 학과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든든한 의료시스템은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전세계가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있을 때 사태수습을 위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아시아 여러 나라가 바이러스 발생 초기에 국경을 봉쇄함으로써 확진자 수를 몇백 명 미만으로 관리하고 있을 때 한국정부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입국자를 차단하지 않는 실책을 범하였다. 이로 인해 중국발 감염자인 31번 확진자 발생 이후에 대구의 신천지교회를 중심으로 확진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4월초 현재 10000여명을 기록하고 있다. 같은 기간 중 대만은 300명, 홍콩은 650명, 싱가포르는 850명인 점을 보면 그 확연히 대비가 된다.

한국은 코로나 바이러스 방역에서 자칫 잘못하면 제2의 이태리나 스페인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헌신적인 의료진과 전문가들, 유능한 행정관료들은 합심하여 대량검사와 신속한 격리, 적절한 집중치료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확진자 증가수와 사망자 수를 100명대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미국이 문제다. 복잡한 의료보험 체계와 과다한 보험료로 인해 미국의 무보험자 수는 수천만 명에 이른다. 또한 터무니 없이 비싼 의료수가도 문제다.

얼마 전 한국에서 온 지인이 LA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날 그날 선불로 지불해야 하는 입원실비가 하루 5,000달러이었으며 한달 후 이와는 별도로 수만 달러의 치료비를 내야 했다. 이러니 미국은 돈 있으면 살고 돈 없으면 죽는 유전무사, 무전사망이란 말이 나돌만도 하다.

차제에 미국 정부도 국민들의 기본적인 권리인 아플 때 치료 받을 수 있는 의료시스템을 구축했으면 한다. 월스트릿의 주가 관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국민들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채수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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