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중 의도’

2020-04-11 (토) 김창만/ 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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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간의 장기 금식 중 생긴 일이다. 프란시스는 제자들과 함께 마을 전도를 나섰다. 마침 음식을 파는 시장 한 복판을 지나게 되었다. 오랜 금식으로 허기가 진 한 제자가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죽을 보더니, ‘나 죽어요, 나 죽어요’ 소리치면서 달려가 죽 한 그릇을 정신없이 퍼먹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스승이 바라보는 앞에서 수도회큰 규율을 어기다니. 너는 이제 끝장이다. 파문을 면할 수 없을 게야.’ 죽을 퍼먹은 제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그 순간이다. 프란시스가 죽 파는 노점으로 달려갔다. ‘나도 배가 고파 못 견디겠다.’라고 하면서 죽을 퍼먹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말했다. ‘애들아 너희들도 배 많이 고프지. 어서 와라. 함께 먹자. 이번 금식은 오늘로 끝이다.’ (앤드류 보우채즈의 ‘Francis of Assisi’중에서)


-프란시스의 제자 포용에는 사려 깊은 이중(二重) 의도가 담겨 있다. 연약한 한 제자의 실수를 사랑으로 감싸 안고 포용하려는 의도와 공동체의 단결을 깨트리지 않으려는 정의로운 생각이 함께 담겨 있다.

죽을 다 함께 먹은 후 프란시스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먹을 것 앞에서 영혼과 육체를 해치는 지나친 탐욕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율법에 얽매인 과도한 절제는 더욱 더 경계해야 할 일이다. 주님은 형식적인 제사보다 자비가 담긴 화목의 제사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 온 둘째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와 첫째의 아들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고 포용한다. 첫째 아들은 동생을 거부하고 아버지에게 화를 낸다. 탕자를 받아들이고 잔치를 베푼 아버지의 포용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둘째 아들은 항변했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말한다. “포용하려는 사랑의 의지가 없으면 정의도 있을 수 없다.” 라인홀드 니버는 말한다. “실제적 포용에 이르지 못한 사랑은 완전한 정의가 아니다.” 정의를 추구하려면 궁극적으로 포용을 추구해야한다는 프란시스의 확고한 이중 의도는 칭송받을 만하다.

<김창만/ 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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