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

2020-03-31 (화) 채수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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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 네일가게도 문을 닫았고 그 옆의 컴퓨터학원과 미용실 그리고 피트니스 센터도 모두 문을 닫았다. 우리 가게가 있는 스트립몰에서 문을 연 곳은 내가 운영하는 세탁소와 맨 끝에 있는 피자집 두 곳 뿐이다. 피자집은 문은 열었으나 픽업이나 배달 주문 밖에 받을 수 없다.

세탁소는 불요불급 업종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영업은 계속 하고 있으나 하루종일 기다려도 손님 서너 명 보기가 어렵다. 이 난리통에 사람들이 먹을 것과 생필품 사재기에 여념이 없어 옷을 세탁하고 다려입는 것은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재택근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드라이크리닝을 할 옷도 별로 없을 것이다.

어쩌다 세탁소를 찾는 손님도 가게에 들어서면 카운터 위에 옷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뒷걸음 쳐서 될 수 있는대로 주인과의 거리를 멀리하려고 한다. 나 역시 손님에게 영수증을 내 줄 때에는 한껏 팔을 뻗어 손님과의 거리를 최대한으로 유지하려 한다. 바이러스를 옮을까 보아 손님과 주인이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손님이 가게를 나가자 마자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가 손을 씻는 것은 물론이다. 어쩌다 손님이 재채기를 하거나 콧물을 흘리면 혹시 감염이 될까 잔뜩 긴장을 하게 된다.
시중에서 마스크를 살 수가 없어 두꺼운 면을 두 겹으로 접은 다음 재봉질하여 마스크로 만들어 쓰고 있다. 면 마스크 안쪽에 포켓을 만들고 그 안에 커피 필터 두 장을 집어넣어마스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면 커버는 매일 빨고 커피 필터도 매일 새것으로 바꿔 끼운다.

미국은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생각하였으나 얼마 전 바이러스 감염여부 검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부터 확진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3월말 현재 이태리와 중국을 제치고 바이러스 감염자 수 1위의 불명예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도 인구밀도가 높은 뉴욕, 뉴저지가 감염자가 가장 많다. 쿠오모 뉴욕주지사는 들불처럼 무섭게 번지는 바이러스 확산 속도를 ‘뷸릿 트레인(총알기차)’에 비유했다. 뉴저지 보건국장 ‘쥬디뜨’는 이대로 가면 뉴저지 주민 100%가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도 있다는 불길한 경고를 하였다.

미주 한인들은 바로 얼마 전까지 한국의 바이러스 창궐을 걱정하며 매일같이 한국에 있는 친척들에게 안부를 물었으나 이제 거꾸로 한국의 친지들이 매일같이 카톡이나 전화로 미국 한인들의 안부를 묻고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학생들과 주재원들을 중심으로 미국보다 방역관리와 치료가 잘 되고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귀국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지난 1월부터 미국의 정보기관과 의료전문가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여러 차례 미 정부에 경고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독감의 일종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했다.

또한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는 전문가들과 언론을 Hoax(유언비어 선동)이라며 몰아부쳤고 기자회견장에서는 정부의 뒤늦은 대책을 지적하는 기자에게 ‘당신은 형편없는 기자’ 라며 면박을 주었다.

또한 ‘차이니즈 바이러스’, ‘쿵플루 (Kung Flue)’라며 아시아인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아 동양계 미국인들이 도처에서 수모를 당하고 있다. 불길은 초기에 진화해야 잡기가 쉬운데 미국정부는 팬데믹이 전세계를 강타하는 동안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여 방역의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것 같다.

산에 들에 꽃은 피었으나 세상은 황량하기만 하다. 우리가게 이웃의 네일가게, 컴퓨터학원, 피트니스 센터가 다시 문을 열어 활기를 띠고 피자가게에서도 즐겁게 식사를 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다시 듣게 될 날은 언제 올 것인가.

<채수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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