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 만한 세상

2020-03-19 (목) 채수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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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옷을 가득 실은 밴을 몰고 가게로 달려가고 있던 길이었다. ‘스카치프레인즈’의 한 네거리에서 우회전하는 순간 차에 이상이 느껴졌다. 액셀을 밟아도 차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꿀렁 꿀렁 주춤 주춤거리더니 갑자기 핸들이 뻑뻑해지며 길 한가운데 서버린 것이다. '맙소사. 연료 게이지의 바늘이 맨 아래 눈금에서 한참 더 밑으로 내려가 있는 것도 모르고 그대로 차를 몰고 나오다니 이런 멍청한 할배 같으니라구...'

트리플 A에 구조요청 전화를 걸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으나 아뿔싸 전화기까지 집에다 놓고 나온 것이 아닌가. '어떻게 하지?' 망연자실 시동이 꺼진 차 안에 앉아있는데 왕복 2차선 좁은 길을 바쁘게 오가는 차들은 이런 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차 옆을 비껴가며 씽씽 내달리고 있었다.
네거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니 자칫 잘못하면 뒤에서 못보고 달려온 차에게 언제라도 들이받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니 길 모퉁이에 집 한채가 눈에 띄었다. 벨을 누르니 '누구요' 하는 무뚝뚝한 소리와 함께 빼끔히 문이 열렸다.


키가 크고 수염이 더부룩한 남자 주인은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로 아침 일찍 찾아온 낯선 방문객을 문틈을 통해 내다보더니 무슨 일이냐 물었다. '번거롭게 해드려 미안합니다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기름이 떨어져 차가 길에 서있는데 전화기를 놓고와서 트리플 A에 전화를 걸 수 없습니다. 전화기를 좀 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주인은 잠깐 기다리라며 안으로 들어가더니 셀폰을 갖고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트리플A에 전화를 걸고 나서 차 안에 앉아 구조차량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경찰 차 한대가 맞은편에서 달려오더니 내 차 옆에 멈춰 섰다. 경찰관은 창문을 열고 왜 길 한가운데 서 있느냐고 소리쳐 물었다. 내가 사정 이야기를 하자 경관은 구조차량이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30분 정도 걸린다 했더니 그는 내 차 바로 뒤에 순찰차를 세우고 경광등을 켰다. 뒤에서 달려오는 차들로부터 추돌 당하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세상에, 한참 바쁜 시간 일텐데 경찰관이 30분이나 내 차 뒤에 서서 나를 보호해 주다니…’ 전에 교통위반 딱지를 떼일 때는 두렵고 밉살스럽기만 하던 경찰관이 마치 천사 같아 보였고 뒤에서 번쩍거리는 공포의 경광등도 아름다운 청사초롱처럼 보였다.

차 안에 앉아 10분 정도 더 기다리고 있으니 키다리 털보 집주인이 성큼 성큼 내 차 있는 데로 걸어왔다. 방금 전 트리플A에서 문자 메시지를 받았는데 10분 후에 도착한다는 전갈이었다. 집주인은 뒤에 있는 경찰관에게도 가서 구조차량이 10분 후에 도착한다고 말하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10여분 후 토잉 트럭 한대가 달려와 내 차 앞에 섰다. 트럭 운전자는 밴의 주유구를 열고 2갤론 들이 오렌지색 플라스틱 기름통을 기울여 연료를 넣어주었다.

이그니션에 키를 꽂고 시동을 거니 부르릉 하고 엔진이 살아났다. '야호, 살았다. 땡큐 땡큐 땡큐.' 고맙다고 몇 번씩이나 경관에게 인사를 하고 차를 돌려 코너 집의 드라이브 웨이에 차를 세웠다. 벨 소리를 듣고 나온 키다리 털보 집주인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고 인사를 했더니 '천만에요. 문제가 해결되어 기쁩니다. 내 이름은 해리이고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였다. 때가 때인지라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백인들은 동양사람 손잡기를 꺼릴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길에 차가 선지 한 시간여 만에 차를 출발시켜 5마일 떨어진 가게로 돌아오면서 마음이 훈훈해져옴을 느꼈다.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생면부지 낯선 사람들이 선뜻 손을 내밀어 도와주니 세상은 아직도 살만 하지 않은가.

<채수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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