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훈툰, 한 모금만’

2020-03-13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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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춥지도 그렇다고 날이 좋지도 않은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그러나 봄은 화창하지도 않고 맑지도 않다. 코로나 19가 눈부신 봄날마저 집어 삼켰다. 이맘때면 새로이 한국민의 자주와 결의를 다지는 3.1운동 기념일도 흐지부지 지난 지 오래다.

그래도 아직 3월인데 이 시 만은 한 번 더 읽고 지나가자. 곽재구의 시 ‘해란강 이야기’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리해산이/ 부친 이야기를 했어/ 삼십년을 서전벌에서 땅벌처럼 / 일제와 싸운 어깨 튼실한 그 아바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훈툰 국물 이야기를 했다지/ 한모금만, 너무 추워‘.....눈은 계속 내리고/ 한모금만 따뜻한 훈툰 국물 한모금만/ 어디선가/ 끝없는 외침 소리가/ 눈덮인 서전벌을 울리고 있었지…”

그런데, 왜 조선사람이 국밥 국물 한 모금보다 훈툰 한 모금을 외쳤을까. 원래, 조선 서민들의 대표 음식은 국밥, 돼지머리나 돼지갈비를 푹 고은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음식이다.


훈툰은 만둣국의 일종으로 만두보다는 교자(餃子)에 속한다. 피가 얇고 국으로 먹는 음식으로 담백하여 한국 사람들도 별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다. 그저 뜨거운 국물이 가득하니 허기를 달래고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만주 땅에서 고기를 폭 고은 국물로 밥을 만 국밥집을 찾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돈 없는 독립운동가들이 먹기에는 가격도 비쌌을 것이다. 그러니 중국 어딜 가나 있는 물만두는 가격도 싸니 죽어가는 순간에도 비싼 국밥 대신 늘 먹어왔던 훈툰 한 모금을 소원했을 것이다.

1,500년의 역사를 지닌 훈툰은 새우 혹은 생선이나 야채를 넣어 만들며 국빈 요리에도 빠지지 않는 중국 대표 만둣국이다.

얼마 전에는 코스트코에서 새우 훈툰 박스를 발견하고는 얼른 사갖고 왔다. 반이 조리된 이 새우 훈툰은 일회용 용기 6개가 한 박스에 포장되어 있는데 내용물은 소금간이 살짝 된 새우와 시금치뿐이다. 맵지도 얼큰하지도 짜지도 않은 이 훈툰을 먹을 때면 동토의 칼바람만 겨우 막은 남루한 움막의 조선인 소작인, 독립도 못본 채 죽어간 헐벗은 독립운동가, 그들이 간절히 원했던 뜨거운 훈툰 한 모금이 떠올랐다.

최근, 우당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西間島 始終記, 일조각 출간)를 읽었다. 책 안에는 우당 이회영을 찾아온 독립운동가들이 노상 굶는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 최고 명문가인 우당의 6형제는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전 재산을 팔아 (현재 800~1,000억원 이상 추정)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의열단을 비롯 1920년대 독립운동을 이끌어간 주역들, 1930년대 만주지역의 무장투쟁, 1940년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주요 간부로 활동한 이들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독립운동에 모든 재산을 다 바치고 이회영 일가가 베이징에서 살 때의 생활은 곤궁하기 짝이 없었다. 이은숙의 회고에 의하면 ‘하루에 점심 한 끼 먹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한달에 절반은 밥을 짓기 위한 불을 피우기가 어려워 살아있는 것이 죽은 것만 못한 그런 상태였다 ’고 한다. 이런 형편인데도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쉬지 않았던 그들, 존경스럽기보다는 놀랍기만 하다.

이은숙은 1910년 만주 서간도로 이주하여 이회영의 뒷바라지를 하다가 1925년 홀로 조선으로 돌아와 삯바느질을 하면서 생활비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서간도 시종기’는 서간도로 가기 직전의 삶부터 한국전쟁 때까지의 경험을 담은 자전적 회고록이다.
코로나19 시국을 맞았어도 현재 우리는 삼시세끼를 착실히 챙겨 먹고 있다. 3.1 독립만세를 외치던 그 때에 비하면 우리는 가진 것이 많다. 지금의 고난과 어려움, 곧 극복할 것이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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