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미년 만세 운동

2020-02-24 (월)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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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己未年, 1919년) 3월 1일, 조선반도 전체를 뒤흔든 우람찬 만세 운동이 바로 삼일절의 유래이다. 이 운동의 성공은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일본 헌병대와 치밀하게 조선인들을 감시하고 있는 일본 관헌(官憲)의 눈을 피하여 어떻게 거대한 전국적인 만세 운동을 조직할 수 있었으며, 수 없이 많은 작은 태극기들은 어떻게 제작하여 배포할 수가 있었고, 어린 학생들까지 총동원이 가능하였는지 참으로 놀라운 조선민족의 거사였다.

많이 알려진 삼일 만세 운동의 선구자 유관순은 겨우 16세의 이화여중 학생이었는데 고향 천안에서 중앙감리교회의 목사와 손을 잡고 아오내 장날 만세 운동을 일으켰으며 이 운동은 즉시 서을로 비화하여 전국적인 만세 운동으로 펴져갔다.

물론 유관순은 체포되어 서대문 교도소에서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수원 제암리 감리교회는 헌병대가 교인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러 전원이 불속에서 순교하였다.
1919년 3월22일 조선총독부는 선교사 대표 22명을 초청하여 긴급간담회를 가졌다. 와다나베 조선 최고 재판소장, 고구부 법무국장 등 총독부 고위 관료들이 나오고, 선교사 대표로는 감리교의 웰치 감독, 장로교의 마펫, 게일 선교사아 출석하였다. 다음은 이 두 선교사가 진술한 발언의 요지이다.


게일 선교사: “나는 30년 동안 조선인의 마음의 세계에 들어가 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어려웠습니다. 조선인은 육신이 편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위안이 안 됩니다. 그들의 마음의 세계는 고대문화로부터 이어져왔고 정신작용이 복잡합니다. 나는 조선인의 정신세계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마펫 선교사는 이렇게 진술하였다. “조선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의(義)입니다. 그들은 굶어도 사람답게 대접 받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른 대접 받는 것을 중히 여깁니다.”(Report of unofficial conference between missionaries and Japanese)

선교사들이 분석한 조선인은 굶어도 떳떳하고 ‘의’를 따라 사는 것이 그들의 가치관이므로 잘 살게 해 줄테니 굴종하라는 따위의 방법으로는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기미년 만세 운동이 보다 나은 경제생활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강 같이 흐르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한다는 인간해방을 외친 민족적인 운동이었던 것이다.

기미년에 일본 관헌에 의한 조선의 손실은 80곳의 교회당이 소각되고, 8개의 교회계통학교가 파괴되었으며, 3,373명의 기독교인,목사 54명, 전도사 157명, 장로 63명이 투옥되었다. 교회의 어린 여학생들을 알몸으로 십자가에 매달아 고문한 기록이 생생하게 선교사들의 수기에 남아있다.

의인(義人)이 되는 것은 단순한 두 가지를 실천하면 된다. 하나는 악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용기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말라. 지금도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목청을 높여 부르짖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의 사명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기 위함이라.”(누가복음 5:18-19) 즉 인간해방이 자기의 목적임을 밝힌 것이다.

“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로 마무리 짓는 독립선언문은 최남선이 기초하였는데 그는 전덕기 목사(상동교회)댁에 기거하면서 자유의 정신과 비폭력주의를 몸에 익혔다. 물론 민족대표 33인 중 이상재 목사 길선주 목사 같은 무저항주의자들이 있었던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들의 주장대로 전국적인 만세 운동이 시종 비폭력으로 일관하여 전 세계를 감동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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