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영화 ‘기생충’이후

2020-02-14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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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영화를 본 것은 대여섯살 시절, 부산 부전동에 살던 때였다. 태화극장인지 동보극장인지에서 자막에 비가 내리든, 중간 중간 끊어지든 상관없이 사람들이 나와 말하고 뛰어가는 소리가 나고 움직이는 화면이 얼마나 신기했던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 9일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영화 ‘기생충’이 각본상, 국제영화상, 감독상, 최고 영예인 작품상까지 4관왕이 되는 것을 보고 너무 경이롭고 흥분되었던 것이다.

최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 극복의 길을 알려주며 서로 건강 조심하자던 한국의 친구들이 갑자기 활기에 차서 “와, 한국 영화 대단하다, 감동이다, 이제 노벨상 가즈아! ” 하는 카톡들이 날아왔다.

그동안 한국영화는 참으로 눈물 나는 길을 걸어왔다. 최초의 한국영화는 1919년 10월27일 종로구 단성사 극장에서 조선인 자본으로 조선인 배우가 만든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 최초의 한국 극영화는 1923년 개봉한 ‘월하의 맹서’였다.


1962년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출품을 시작으로 꾸준히 아카데미상 문을 두드려왔지만 늘 철옹성이던 아카데미였다. 젊은 연인들은 데이트 코스로 ‘한국영화는 신파’ 라며 비싼 돈 주고 들여온 외화를 보았다.

그러다가 1974년 별들의 고향, 1977년 겨울여자를 지나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서울에 100만 관객을 모으며 당시 최대 관객기록을 세웠다. 2003년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가 한국 영화 1,000만 시대를 열었고 2007년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 전도연이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전도연 상대역은 송강호, 여전히 상복이 없다.)

박찬욱 감독 ‘올드보이’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임권택 감독 ‘취화선’ 칸 영화제 감독상, 이창동 감독 ‘시’ 칸영화제 각본상, 김기덕 감독 ‘피에타’가 베니스 영화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는 등 유럽에서는 한국영화 인기가 나날이 올라갔지만 ‘백인 일색 잔치’ 라고 소문난 아카데미에는 단 한번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런데 봉준호의 ‘기생충’은 그 단단했던 문을 확 열어젖히면서 무려 4번이나 무대에서 한국어로 수상소감을 말했다. 한국영화사는 이제 ‘기생충’ 이전과 이후로 역사가 써져야 한다. 영화산업 종사자들에게는 커다란 숙제가 주어졌다.

봉준호 감독에게는 모든 배우가 눈 한번이라도 마주치려 하고 돈을 싸들고 온 투자자들이 몰려들 것이다. 하지만 강우석, 박찬욱, 강제규, 이준익, 홍상수를 비롯 재능있는 감독들과 좋은 배우들이 많다. 골고루 다양한, 창의적인 각본과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어야 한국 영화 앞으로의 100년을 기대할 수 있다.

또 작품 자체가 좋아야 하는 것은 기본이지만 이번 아카데미상 수상을 보면서 홍보와 마케팅이 얼마나 중요한 지도 느낄 수 있다. 1995년부터 한류 콘텐츠에 꾸준히 투자 해 온 CJ ENM과 북미배급사인 네온이 홍보 캠페인에 100억이상 투자하였다고 한다.(미국 배급사나 스튜디오의 4분의 1) 북미권에서 열리는 영화제마다 직접 갔고 봉준호 감독은 외신 인터뷰 500번 이상, 배우 송강호는 쌍코피를 쏟으면서 5개월이상 시사회에 참석했다.

영화를 보고 온 아이들이 먼저 친구들에게 입소문과 SNS로 대화하고 집에 와서는 부모에게 보러 가라고 하는 등 젊은층을 공략한 점도 평가할 만 하다.

워낙 ‘기생충’이 대단한 성과를 내고보니 정작 세월호 참사를 다룬 ‘부재의 기억’은 묻히고 말았다. 한국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상 단편 다큐멘터리 후보에 올랐지만 본상 수상에는 실패했다.

이날 시상식에 앞서 이승준 감독과 함께 유족인 2명의 어머니가 아들의 사진을 담은 노란 명찰을 목에 걸고 레드 카펫에 올랐었다. 한국 단편다큐의 역사를 새로 쓴 이들에게도 박수를 보내자.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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