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겨울, 그 숲에서

2020-01-24 (금) 최동선/ 수필가
크게 작게

▶ 커네티컷 칼럼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짙은 안개가 이른 새벽의 출근길을 위태롭게 하더니 아침 내내 비가 내렸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비가 그쳤고, 잠시 얼굴을 내밀던 겨울의 짧은 해는 서둘러 산 등성을 넘었다. 아득히 흔들리는 불 빛을 따라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길은 다시 한층 깊어진 어둠이 막아선다. 문득 하루 날씨가 마치 우리의 삶과 너무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자동차 오디오 볼륨을 높였다. 흘러 나오는 굵고 진한 피아노 선율이 아픈 곳을 찾아내 꾹꾹 누르며 위로한다. 어떤 누군가에게는 완성해야 하고 넘어서야 했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지나간 날들을 뒤돌아 보면 고비마다 넘어지고 좌절한 발걸음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많이 분노했고 또 아프게 절망했었다. 남의 잘못에는 인색한 잣대를 들이 대면서도 스스로에게는 무한히 관대 했고, 화해는 늘 미완인 탓에 낮은 자존감을 감추어야만 했었다. 마음은 불편했으나 결연하게 결정하지 못했고, 그래서 시류에 따라 흐르는 것이 옳다고 변명하며 자주 자가당착에 빠졌다. 돌아보면 비굴한 자기 위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시간은 늘 아쉽고 그립기만 하니 참 이상한 일이다.

​새 달력을 걸었다. 내가 이미 묵묵히 살아낸 새해의 며칠이, 또 올 한 해 열심히 걸어야 할 하루하루가 선명한 숫자로 쓰여 있다. 돌아켜 보면 굳이 시간과 시간의 경계를 나눌 필요가 없는데도 ‘새해' 라는 단어가 의식의 흐름을 잠시 멈추게 했던 것같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앞과 뒤, 지나온 것과 다가올 것의 경계에서 불안해 하면서도 설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상에 쫓기다 멈춤의 순간을 놓치고, 그것을 알아차릴 즈음에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늘 멀리 와 있었다. 속절없는 시간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삶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체념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에 익숙해지고, 지난해와 똑같은 한해를 보내며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시인이 말하기를 대부분의 사랑은 이별로써 끝나지만 어떤 사랑은 이별이 끝난 후에 비로소 다시 시작 된다고 했었다. 어쩌면 계절도 이와 같아서 가을과의 애틋한 작별후에 만나는 겨울은 또 다른 시작의 계절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겨울은 봄을 기다리는 과정이라 여기며 고개를 돌려 외면했던 것들과 정직하게 마주하는 계절이었다. 얼어붙은 숲에도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직립해 있는 나무와 밤이면 얼어붙는 별들과 이제 칼날이 되어버린 바람이 그 숲에 있었다. 차가운 바람에 나무들이 터졌을 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마침내 겨울을 온전히 볼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사람들이 외면한 숲길을 걸을 때마다 숲 역시 오랜동안 사람 발자국을 기다려 왔을 거라는 나의 생각은 어느새 믿음으로 변했다.

​겨울 숲은 잠든 것이 아니라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숲에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었다. 별이 꽁꽁 얼어버린 추운 겨울에 산 아래 호수가 산 너머로 떠났다는 전설을 들으며 까무룩 잠이 들었을 때, 나는 외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외할머니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남루했던 것들의 배경은 늘 겨울이었다. 숲이 끝나는 곳에 별들이 알알이 박혀 있음을 그 때 알았고 그 밤이 끝나는 곳에 새벽이 있음도 알았다. 그리고 전설 속에 등장하던 겨울 숲은 야윈 외할머니의 무릎과 함께 또렷이 기억에 남아 그대로 그리운 풍경이 되었다.

<최동선/ 수필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