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우리 집 감나무

2019-11-27 (수) 방인숙 / 수필가
크게 작게

▶ 독자·문예

5년 전 봄, 친구들이 모여 감나무 묘목들을 우편주문 했다. 식목할 여건상 언감생심인 나만 빼곤. 그랬는데 Y가 내 몫이라면서 연시감묘목을 덥석 안겼다. 어디다 심을 지 행복한 고민 중에 떠오른 대안이 있다. 몇 년 전, 뒤뜰 작은 꽃밭 구석에 땅을 파고 큰 빨래통을 넣어 자칭 연못이라며 금붕어를 키웠다. 내손으로 만든 물웅덩이 수준이라 자칫하면 모기양식장이 되는 바람에 난감하곤 했었다. 또 길고양이가 금붕어들을 다 포식해버린 전적도 있던 터. 이참에 마음을 비워 웅덩이 연못을 감나무로 메워버렸던 것.

친구들 감나무는 2년이 되자 꽃과 감 소식을 전해왔다. 허나 우리감나무는 세 살이 되어도 그저 늘 푸른 잎뿐이다. 앞집의 거대한 상수리나무의 깊은 그늘 탓으로 유추할 뿐, 방법이 없다. Y의 깊은 정이 실린 감나무기에 더 안타까웠다. 파리가 사라진 늦가을부터는 감나무 밑에다 과일껍질 등을 묻어주며 부지런히 기를 북돋아줬다. 그렇게 심혈을 다해 보듬건만 내내 가지만 뻗어나갔다.

그러다가 작년에 비대한 상수리나무가 왕창 가지치기를 당했다. 늘 상 햇빛을 간절히 그리워하던 감나무에겐 그야말로 천우신조(天佑神助)! 이후 하늘이 트이고 강한 햇살이 많이 안아주자 잎이 더 푸르러지고 윤기가 돌았다. 드디어 5년 만에 처음 고대하던 꽃도 달아 나를 감격시켰다. 여태 감꽃 실물을 본 적이 없으니까. 다른 과수나무 꽃처럼 하늘하늘 화사하지 않고 단아한 단추 같다. 검소하고 소소한 자태지만 볼수록 마음이 은은하게 당기는 더덕꽃 이미지다. 신기하게도 꽃잎처럼 펼쳐진 꽃받침위로 납작한 상수리열매 같은 앙증맞은 애기감이 다닥다닥 열렸다. 비로소 내게도 감 풍년이 오나 하는 기대로 ‘내 마음은 풍선’이었다. 그런데 그 ‘꽃열매’들이 무정하게도 자꾸만 추락했다.


그 와중에도 탈 없이 살구만치 커주는 것들이 제법 많아 고마웠다. 허나 비바람이 치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는지 미련 없이 투신해버린 ‘살구감’ 들이 땅에 즐비하곤 했다. 친구들 감나무도 많이 떨어진다지만, 이러다 하나도 안 남을까 은근히 마음 졸였다. 다행히 사계절의 변화와 심술에도 무사히 적응해 온 나무가 드디어 열매를 자두만큼 영글게 했다. 한여름이 되자, 남아있는 걸 세어보니 고작 12개다. 첫 해인데 잘했다며 감나무를 치하해 줬다. 바람 타는 잎사귀들 뒤에서 숨바꼭질하자는 감들과 눈도장 찍는 게 행복한 일과였다.

밤새 태풍경보가 발효됐던 다음날, 세상에!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몇 번을 세어 봐도 딱 두 개뿐이다. 우려했던 사태다. 애통하게도 높은 가지나 중간쯤에 달렸던 감들은 깡그리 전멸이다. 제일 밑쪽의 가는 가지 끝에 낮게 달린 두 개만 온전하다. 인간사마냥 겸허하고 낮은 자세가 끝까지 버티고 이긴다는 사실만 새삼 인지했다.

하여간 거의 다 자라 안심시켜 놓고는 뒤통수치듯 나뒹구는 감들. 너무나 애석하지만 본드로 붙여 줄 수도, 인큐베이터에 넣을 수도 없다. 속수무책이니 더 허망해 부엌 창가에 놓았다.

혹여 토마토나 바나나처럼 햇빛을 받아 익기를 소원했지만, 끝내 뇌사상태라 고별할 밖에 없다. 달랑 남은 두 개라도 감사하고 위안 삼을 밖에. 포옥 감싼 감잎들에 살짝 가려질 때면 가슴이 철렁하곤 했지만.

조마조마 애를 태우는 내 속을 아는지 무난히 제 사이즈로 여물어갔다. 가을이 익어가자, 신통하게도 연한 오렌지색으로 물들더니 점차 짙어졌다. 감잎들이 하나 둘 속절없이 떨어져도 늠름히 제 자리를 지켰다. 동생과 Y의 집의 감나무는 꽤나 크다. 그런데 다람쥐들이 심심하면 한 입 두 입 맛만 보곤 휙휙 땅에 내던진단다. 새들도 툭하면 쪼아대 상처투성이 감으로 된단다. 운 좋게도 우리 감은 단 두개지만, 워낙 여린 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형국이라 다람쥐와 새의 접근에서 자유롭다.

밤에 첫 서리가 내렸던 날, 감나무가 어지간히 추위에 떨었던지 제법 무성하게 남았던 감잎들을 일시에 다 떨어냈다. 함초롬히 두툼하게 감잎이불까지 짜서 덮었다. 인제 완전 나목의 텅 빈 가지에 애절하게도 주황색감 두 개만 의연히 드러났다. 두 개의 까치밥만 남은 셈이다. 정말 운치 있는 산수화다.

30cm 간격을 두고 나란히 내려온 가느다란 두 가지가 꼭 기찻길처럼 선명하다. 그 기찻길 끝에 같은 높이로 나란히 달린 쌍둥이 감! 서로 의지하며 삶의 질곡을 치열하게 이겨낸 결실이겠다. 슬며시 미소가 피어난다. 생의 종착역이 가까워져 오롯이 둘만 살고 있는, 우리부부의 모습이 오버랩 돼서다.

볼수록 저 감나무의 일생이나 우리네 인생이나 다를 바 하나 없다.

<방인숙 / 수필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