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줌바 클래스

2019-11-20 (수) 방인숙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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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타운의 커뮤니티센터(Community Center)에 시니어를 위한 무료프로그램이 많다. 나도 일주일에 한번 운동 삼아 라인댄스 반에 참여해온지 6년째다.
이 클래스엔 60대부터 80대까지 50명가량 모이는데, 그중 한국인이 삼분의 일, 중국인이 삼분의 일, 그 외가 서양인들이다.

엘렌(Ellen)이란 선생도 70대의 백인이다. 그 나이에도 어찌나 열정적으로 가르치는지 대단하다 싶어 존경심이 든다. 전형적인 멋쟁이 미국할머니답게 항상 귀걸이부터 목걸이에 옷까지 색깔을 맞춰 입는다. 차의 번호판이 숫자가 아니고 LIV2DANC다. 아무래도 끝 글자는 댄스를 뜻하는 게 아닌가 싶어 물어봤더니 LIVE TO DANCE를 뜻한단다. 그만큼 춤을 사랑하고 춤 가르치는 걸 사명으로 아는 분이 아닐까. 그러니 여러 곳에서 아침반 저녁 반으로 수업을 하지 싶다. 그 엘렌이 라인댄스뿐만 아니고 다른 센터에선 줌바까지 한단다. 줌바는 좀 격한 운동으로 치부, 아무래도 내 나이엔 무리로 생각해 엄두를 못 냈다. 하물며 멀리 원정까지 가야돼 미련 없이 포기해왔던 터.

그러던 차, 여기 센터에서도 엘렌이 줌바 클래스를 개설했다. 그래도 영 자신이 안 서 망설였다. 그저 하루만 라인댄스 끝난 후 옆방에서 친한 한국인들끼리 준비해온 간식들을 먹으며 환담하곤 했다. 그 사랑방동료들 몇이, 줌바를 해보니 생각보다 쉽고 운동이 된다며 권유했다. 기실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엘렌이 하는 건데 못 따라가겠나 싶어 일단 해보기로 했다.


보통 15명에서 20명 정도라는데 가보니 딱 15명이다. 처음인데다 빠른 음악에 맞추며 쉼 없이 하다보니 발이 무겁고 숨이 가빠질 때였다. 바뀐 음악의 선율이 ‘익숙한데’ 싶은 순간, 귀에 쏙 들어오는 노랫말이 확실한 한국어라 깜짝 놀랐다. BTS가 부르는 ‘아리랑’이었다. 엘렌의 동작템포도 좀 느슨해지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에선 두 팔 올려 파도타기 한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하는 대목은 두 팔을 얼굴에서부터 앞쪽으로 올려 날개처럼 펼치며 번갈아 발뒤꿈치를 찍고 앞으로 내밀기다. 엘렌이 가사의 뜻과 고전무용을 접목시킨 율동이었다. 땀을 흘리며 가르치는 엘렌이 너무 고맙다.

마침 내 옆 자리엔, 언젠가 라인댄스시간에 “너의 나라 가수 BTS알지. 춤과 노래가 경이롭더라. 청년들 얼굴이 다 너무 예쁘다”고 감탄했던 여자다. 분수처럼 솟는 자긍심에 더는 못 참고 동작 따라 하기에 열중인 그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이 곡은 한국의 전통적인 노래인데 그 BTS가 부르는 거야” 하니까 신나고 최고라며 ‘엄지 척’을 한다.

그나저나 우리 민족의 슬프고 한 서린 애환의 노래로만 사랑받던 아리랑으로선 너무나 의외라 놀랐겠다. 먼 타국에서 빠르고 흥겨운 줌바 배경곡으로 재탄생돼 외국인들을 매료시키며 운동에 전념하게 할 줄이야. 나로서도 전연 꿈조차 못 꿨던 일이니까. 줌바 시간에 불쑥 접한,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음악으로 뽑혔다는 자랑스런 아리랑! 내겐 예기치 못한 멋진 선물이었다.

끝난 후 엘렌에게 한국의 대표적인 민속곡인데 어찌 알고 구했느냐 물었다. 아리랑이 너무 좋아서라며 핸드폰으로 한국 아이돌이 춤추고 노래하는 걸 보여준다. 새삼 K-POP의 위력이 실감된다. 문화의 힘이 이토록 막강하다.

엘렌이 줌바가 라인댄스보다 쉽냐고 물었다. 라인댄스는 정신 바짝 차리고 순서를 외워야 되니 브레인 운동이고, 줌바는 보면서 따라하는 육체적 운동이라 쉽다고 했더니 웃는다.

레마르크도 ‘늙음, 죽음보다, 녹슨 삶이 두렵다’고 고백했다. 나이 탓인지 부쩍 의기소침해왔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이 나이엔’ 하고 종래 줌바를 시도 안했다면 못 느껴봤을 긍지와 희열이니까. 생의 활력삼아 나를 위한 시간과 운동을 일순위로 투자하기로 속다짐했다.

사견(私見)하나!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우승한 클래식 음악가들처럼, 문화의 전도사로 크게 국위를 선양하는 BTS같은 대중음악가들에게도 군 면제 혜택이 주어지면 어떨까. 음악의 맥을 끊지 않고 이어가게끔...

<방인숙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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