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귀한 선물

2019-10-04 (금)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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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가족들과 소통하는 스마트 폰 사랑방에는 날마다 새로운 사진이 올라 온다. 며느리가 육아 일기처럼 올리는 사진을 검색하느라 검지 손가락이 매양 분주하다. 화면 속에 풍덩 빠져 벙긋거리는 손녀를 어르며 어릿광대가 되고, 동영상이 올라 오는 날이면 감탄사 대신 신음처럼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양 손발을 활짝 펴고 하늘을 향해 비상을꿈꾸는 듯한 용트림의 날개 짓! 맑고 깊은 아들을 닮은 눈동자에 포로가 되어 빠져나올 길을 잃고 헤매다 만나는 새로운 기쁨! 젖 냄새촉촉한 뺨에 입맞추고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을 대신한다.

가끔씩 만남은 너무 짧고 얽매인 시간의 기다림은 진정 멀기만 하다. 누군가에게는 이미 흐려진 흑백사진이 되었고 또 누구에게는 미래를 설계하는 청사진이 현실이 된 지금 내겐 일상이 특별하다. 백일을 앞두고 힘겹게 뒤집기를 반복하며 쉴새 없이 꼬물거리는 발가락을 터치하다 콧등을 때리는 시큼한 한 줄기 감동을 추스른다.

결혼을 하고 그 이듬해 아들과 처음 만났던 날이 아련하다. “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 라는 그 시대의 슬로건은 설득력이 있었고 내 주변의 친구들도 딸이나 아들 상관없이 대부분이 외동이를 두었다. 혼자 지내는 아들을 바라보며 몇 번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탈 없이 잘 자라주었기에 모른 듯 잊은 듯 세월이 훌쩍 흘러갔다.

엄마의 역할을 감당하기에 미숙했던 내게 선물로 안겨진 아들이 소중하기도 두렵기도 했던 기억이 가뭇하다. 개인의 사생활을 어느 때보다 소중히 여기고, 사회적 성취에 몰두하다가 혼기를 넘기는 젊은 세대가 넘쳐나는 현상이다.


결혼한 후에도 자녀의 출산을 미루는 이유가 한 둘이 아니라는 기사를 심심치 않게 접한다. 인구 감소가 심각하여 국가적 정책이 다양하게 기획되어 있지만 백약이 무효라는 현실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이구동성이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현명한 시도가 계속 되길 바라는 시대적 요구를 너나 없이 절감하는 이유다.

감사하게도 아들은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제짝을 찾아 소박한 가정을 이루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아기가 없어서 애틋한 마음이 깊어만 갔다. 그럴수록 조급함을 떨쳐버리도록 함께 노력했고, 소망을 붙잡고 가족 사랑의 울타리를 견고하게 세워 나갔다.

아들과 며느리는 아기를 기다리며 신앙이 더욱 깊어진 듯 밝은 모습을 유지했고 건강을 위한 식단과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소한 의견에도 서로 존중하고 한 발짝 물러서서 다독이며 인내한 보람이 은총으로 내려왔다.

8년의 기다림이 헛되지않게 예쁘고 튼튼한 공주를 선물로 보내 주셨다.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두 손을 마주잡고 감격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고 하는 말끝에 눈앞이 흐려졌다.

마음고생을 내색하지 않고 견디느라 힘들었을긴 시간을 대신해 줄 수 없어서 미안했고 대견스럽기도 했다. 신세대답게 며느리는 육아의 정석을 고수하고 있다. 산후 조리부터 갓난 아기를 돌보는 일도 미리 터득해둔 지식으로 깔끔하게 해내고 있으니 육아 선배로서 훈수 둘 자리마저 양보해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생명! 오랜 기다림과 고통의 순간마저 기쁨으로 승화되는 고귀한 선물! 초보 엄마가 손수 만든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화관을 두르고 유아 세례를 받는 손녀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 온 아기 천사가 아닌가.

시월의 능금처럼 붉게 물드는 숨길 수 없는 내리사랑 하루 해가 짧기만 하여라.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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