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래된 신문

2019-09-27 (금)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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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신문은 늘 나보다 한 걸음 먼저 도착해 날 기다렸다. 눈이 내리는 한겨울에도, 폭우가 쏟아지는 7월의 그 어느 날에도, 이른 새벽 문 밖의 차가운 바닥에 놓여 있는 신문을 집어 들 때 마다 하루의 시작이 평범해서, 또는 예측 가능한 일상이라서 감사했다. 가끔은 내가 신문을 기다리는 날도 있었는데 문 밖을 드나들며 수시로 확인하고 조바심치면서도 기다릴 대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른 즈음의 마음처럼 설레였었다. 그런데 그렇게 20여년을 넘게 나보다 한 발짝 앞서 와 기다리던 신문이 몇 주 전 부터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물으니 커네티컷 지역은 더 이상 직배를 할 수 없어 메일로 발송한다는 대답이었다. TV나 인터넷을 통해 날마다 뉴스를 보면서도 신문이 없는 아침은 왠지 허전했다. 일 할 준비를 마치고 커피 한잔을 마시며 느긋하게 신문을 뒤적이던 나의 일상에 생긴 갑작스러운 변화에 안절부절 했다. 기다림은 예상보다 길어졌으나 그래도 기다려야 했다.

그 날 이후, 2주일쯤이 지나 첫 신문이 우편배달부 손에 들려 편지처럼 도착했다. 반가웠으나 발행된지 한참이 지난 오래된 신문은 빛바랜 잡지에서 떨어져 나온 광고지처럼 공허했다. 인터넷 뉴스나 SNS 를 통해 알고 있는 지나간 소식들은 이미 뉴스로서의 생명이 소멸된 시간이 흐른 후였으니 이미 신문으로서의 의미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습관처럼 신문을 다시 뒤적이며 읽어 내려갔다. 그동안 방송을 통해 질리도록 반복하여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새로움은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옛날에 명절 때 마다 방송되던 추억의 영화들과 오버랩 되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미 알고 있는 다음 장면을 마음 졸이며 보던 그 때에도, 지나간 소식을 활자로 읽으며 눈으로 확인하는 오늘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신문 지면을 가득 채운 뉴스는 그동안 거대한 공룡처럼 모든 이들의 관심을 끌어 모았던 내용이었다. 그것은 일일 드라마처럼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예고편 없이 이어졌다. 제법 큰 뉴스는 일주일을 넘기기도 하고 한 달을 끌고 가기도 했다. 좌우로 나뉘었고,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며 서로를 아프게 할퀸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신문을 펼쳐 든 나는 여유를 즐긴다. 이미 대부분의 뉴스는 신문이 도착하기 전에 결론이 나 있거나 알고 있는 내용인 까닭에 굳이 날짜 별로 구별해 읽을 필요도 없었다. ‘그때는 그랬었구나’ 라고 한 뼘 건너에서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가끔은 서둘러 결론을 내려 버리던 편협했던 내 사고의 영역을 돌아본다.

오늘도 묵은 신문을 읽고 있는 나는 이미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놓은 뉴스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일상에 매여 놓쳐버린,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 소식에 눈길이 머문다. 지면 한 구석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고단함이 때론 나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알록달록한 활자의 여행사 광고가 올 가을에는 단풍 관광을 떠나라고 유혹한다. 낯익은 도시를 발견하고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큼직하게 쓰여진 낯선 도시로의 휴가를 꿈꾸며 설렌다.

이제 바뀐 일상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다. 아직은 이틀 치의 신문이 두툼하게 몰아서 오기도 하고, 우편배달부의 스케줄에 따라 석간 신문이 되어 버렸지만, 2주일씩 걸려서 배달되던 신문이 1주일 남짓이면 책상위에 놓인다. 이제 신문이 제시간에 오느냐 아니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불편함이 한 단계 승화되고 나니 이렇게 한 발짝 떨어져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고 있지 않은가?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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