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등] 발본환원
2019-09-26 (목) 12:00:00
동진 스님 / SAC 영화사 주지
십여년 넘게 타향살이를 하다보니, 남들이 말하는 향수병이란 게 이런 건가 하는, 낯선 감정과 만났다. 추석을 비롯해, 한국 고유의 명절 즈음이 되면, 산사의 새벽 범종 소리,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나무 위로 처연히 떠오르던 추석 달, 코스모스 길, 가마솥에서 피어오르던 따스한 김... 그리움이 슬며시 피어난다. 그런데 이번 추석엔 그 정점을 찍기라도 하려는 듯, 한국의 절집으로 당장 돌아가고 싶다고, 감성은 밖을 치달렸다. 그렇지만, 스스로 무서울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그런 고향은 없다는 것을. 떠나올 때의 한국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그때의 나 또한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곳에 간다 해도, 그 시공간은 다시 만날 수 가 없다. 영,원,히. 이미 그곳은 변하여 낯선 곳이다. 코스모스 있으나 그때의 코스모스가 아니고, 줄줄이 안행하는 스님들 있으나, 같은 도반들이 아니다. 자명하다. 시절인연이 다르다. 진실을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이곳에서도 그런 정서를 누려보려고, 굳이 한국 소나무를 사다 심고, 능소화, 연꽃, 백일홍, 해당화, 산수국, 매화... 한국 절집에 있는 꽃과 나무들만 골라 사다 심고 가꾸었다. 새해면 김치만두 떡국을 끓이고 동지면 팥죽을 끓이고...
하지만, 이곳에도 또한 고향은 없다. 아무리 한국처럼 해도 그것은 ‘처럼’이지 ‘한국’은 아니다. 또한 이곳 식구들 아무도 한국의 명절 정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 팥죽 끓이는 일이 단지 노동이지, 즐거움이 아니다. 이것이 잘못은 아니다. 당연한 이치이다. 여기는 미국이고 신도들 또한, 여기서 산 세월이 더 긴, 미국사람들인 것이다. 업식이 오래 미국식으로 굴러갔다. 한국은 그냥 희미한 추억으로만 존재할 뿐, 과거인 것이다. 모든 추억은 과거이다. ‘과거심 불가득’ 이므로 당연 만날 수 없다. 그리하여 추억을 꺼내볼수록, 손에 남는 건 허무감뿐이다.
결국, 여기, 를 매순간 기쁘게 살 수 밖에 없다는 당연한 귀결에 도달한다. 기쁘든, 아니든, 여기, 밖에 살 수 없으므로. 그래서 허무도 공부자리가 된다. 그리고 그걸 깨달아 아는 건, 행복이다. 향수를 가지고 잠시 놀다가도 바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병으로 까지는 밀고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과거에 매달리는 건. ‘저 물속의 달을 진짜인줄 알고 건지려는 헛된 손짓’ 같은 일이다. 우리는 늘, 과거의 내가 여기 있는 나, 라고 생각되고, 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지만, 고정된 나, 는 없으며, 늘 오늘, 이 순간 새로 나고, 새로 살 수 있을 뿐, 과거로도 미래로도 갈 수 없다. 생각으로는 백천번을 가도, 마음은 현재에 있고 찰나에 있어, 바로 여기, 밖에 움직일 수 없다. 이곳에 정착하고 살면서도, 늘 한국에 마음 달려가는 이는, 이곳, 에 사는 게 아니다. 여기, 를 말하지 못하고 늘 왕년, 을 부르짖으며 살게 된다. 본인이 그려낸 허구일 뿐, 자신이 꿈꾸는 고향이 없다, 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정처는 없다.
요번 추석 법회는 송편 만들기도 없이, 심드렁하게 지나갔다. 추석이 멀리, 금요일에 있어, 일요일 추석은 심정적으로 애매했다. 가까운 미래엔 추석을 안 쇠게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중은 갈수록 더 철저히 하지 싶다. 이곳에 추석을, 반드시 심고야 말리라, 하고. 이미 여기 13년을 살지 않았는가.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세월이다. 한국식, 미국식이 중요한 게 아니다. ‘여기’ 만의 추석이면 된다. 그것이 바로 정답이다. ‘발본환원’ 인 것을. ‘수처작주’ 되새기는 가을이다.
<동진 스님 / SAC 영화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