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73)제40대 Ronald Reagan 대통령⑤

2019-09-23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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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gan은 1984년에 민주당의 Mondale 과의 재선 경쟁에서는 더욱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하였다. Mondale 의 출신구인 Minnesota 주와 Washington, D.C. 를 제외한 전국을 휩쓴 Reagan 은 5,446 만표를 받았고 Mondale 은 3,758 만표를 받는데 그쳐서 선거인단 표수로는 Reagan 이 525 대 Mondale 이 13표 이었었다고 한다.

1980년의 대통령 선거때에 Reagan 은 “철의 여인” 이라고도 불리웠던 영국의 Margaret Thatcher 수상의 통치철학에서 여러가지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국영토에는 해가 지는 일이 없다” 라고 한때 위세를 부려오던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후 전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던 식민지들을 모두 잃게되자 국제정치에서 영향력을 잃어가고 국가경제도 제2류급으로 하락하기 시작하여 국민들도 “패배감”에 많이 젖어 있었었다.

보수파였던 Thatcher 는 국가의 역활과 규모를 줄이고 예산과 세금을 감소하고 각종의 규제를 줄이며 공영사업들을 점차로 민영화 하는등 과감한 보수정책들을 집행하여 하향 일로에 있었던 영국의 국운을 돌려 놓았다. 숙명론, 패배감에 찌들려 가던 영국 국민들에게 영국이 다시 제1류 국가가 될수 있다는 신뢰감을 불어넣었다. Reagan 의 재임기간을 보면 그가 분명히 Thatcher 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정책들이 많이 있다.
1980년대에 같이 집권을 했던 두 수반들은 각각 1970년대의 “혼란과 패배감” 에서 1980년대의 “새질서와 자신감” 으로 국가의 방향을 돌려 놓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우파 혁명가”들로 자처 했을지도 모르는 두 지도자들은 계속 친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었는데 미영간의 “전통적인 우방” 관계가 유지되도록 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제2차 세계대전전 서방의 열국들이 식민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을때에 미국은 “유일하게” 식민지 국가로 “변질”되지 않았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던 까닭에 종전후 “식민지 독립” 등의 국제분쟁이 생길때에 미국은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정책을 써왔었다. 영국이 “Falkland Islands” 라고 부르면서 총독을 임명하여 통치해 오던 Argentina 의 작은섬을 1982년에 Argentina 가 “이 섬은Islas Malvinas 라고 불리우는 우리의 영토” 라고 주장하면서 군대를 보내서 점령하자 Thatcher 는 영국함대를 보내서 Argentina 군의 항복을 받고 이 섬을 “탈환” 하여 버렸다.

필자는 미국의 태도를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영국함대가 대서양으로 내려오고 있을때 Reagan 은 “미국은 영국을 지지한다” 라고 말하면서 영국에게 각종의 정보를 제공해 주었었다. 두 수반간의 친교가 외교정책에 영향을주었었다고 생각된다.

대통령 Reagan 에 대한 극단에서 극단에 이르는 엇갈린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보수성향의 사람들은 Reagan 의 정치철학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대강 아래와 같다.

미국은 Pilgrim 들이 소망했던대로 “전세계의 모범국가 (City on the Hill)”이며 미국의 건국조상들이 구상했던대로 “이상적인 공화국” 이다. 미국은 Lincoln 대통령이 소망했던대로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최선의 희망” 이며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주장했던것 처럼 모험적인 새 사업이 가능하며 강한 결단과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무슨 꿈이라도 이룰수 있는 나라이다. 동시에 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이 시도했던것 처럼 많이 가진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나라이다. 그러나 연방정부 권한 집중 보다는 많은 권한을 각주가 유보하는 지방권한 분권이 좋은 제도이다.

Reagan 의 지지자들이 예찬하는 그의 “업적”들에 대해서 얘기를 시작하기전에 그도 “해결”하지 못하였던 미국 Social Security System 에 고질적인 문제점들을 한번 더 짚어보기로 하자. 거의 모든 미국인들은 Social Security 가 급속히 감당할수 없을 정도로 팽창하고 있다는것은 알고 있었으나 암을 돌팔이 의사처럼 함부로 떼려 다가는 생명까지 함께 잃을수 있는것도 알고 있었다.

보통의 상식을 가진 국민들은 암의 원인도 알고 있었다. FDR 이 예상했던것 보다 신생아 출생률은 줄어들고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노년층은 늘어나는데 마련해놓은 기금도 없는채로 은퇴등 각종의 복지혜택은 시작되었어 야만 했었다. 궁극적인 해결책도 상식적으로 알고는 있었다. 은퇴년령을 늦추거나, 은퇴혜택을 줄이거나 Social Security Tax 를 올리거나 아니면 부족한 액수만큼을 일반 재정예산에서 무상으로 지원받거나 꾸어오는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방법을 조화스럽게 맞추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일은 정치적인 hot potato 이었었다. 제도의 창설자인 FDR 을 원망만 할수도 없는 노릇이라 많은 대통령들은 이 문제를 carpet 밑에 밀어넣고 못본척 해왔었다. 실제로 어떤 일들이 일어 났었던지를 몇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미국의 첫 Social Security 은퇴년금으로 Vermont 에 살던 Ida Fuller 라는여성에게 $22.54 가 1940년에 지불되었다. 그녀는 그때까지 $22.00 을 Social Security Tax 로 냈었었다. 그녀가 1974년에 마지막 수표를 받았을때까지 그녀는 총 $20,944 를 지급받았 는데 그녀가 낸 세금은 총 $22 뿐이었다. 1982년에 이르러서는 은퇴자들이 평균으로 자기가 은퇴년금을 위해서 낸 Social Security Tax 의 다섯배를 은퇴년금으로 받았었다. 또 은퇴년금 기금의 “안전”을 위하여 민간 평균투자 소득이 년평균 15% 가 되고 있었을 때에도 Social Security 는 년리 2% 미만인 연방채권에만 “투자”하도록 하였고 일반 연방정부 재정적자가 누적되자 무이자로 Social Security 기금을 돌려서 쓴후에 곧 갚지 않는 사례들까지 자주 일어났었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는한 Social Security System 이 재정파산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공공연한 비밀이었었다.

Reagan 은 Social Security 를 늙은 은퇴자들이 젊은이들의 등을 쳐먹는 제도라는 의미에서 “세대간의 다단계수법 투기” (Intergenerational Fonzi Game)” 이라고 혹평 하였었다.
Social Security System 의 이러한 구조적인 심각한 문제가 시작되고 있음을 짐작을 하고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또 매번 대통령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1950년 에서 1972년에 이르는 사이에 Social Security 혜택 액수와 혜택 자격을 11번이나 인상 하였는데 그중 여섯번은 선거가 있던 해에 입법되었으며 1972년 부터는 소비자 물가지수 (Consumer Price Index) 의 인상에 따라 혜택도 자동적으로 인상되도록 “후한 인심”까지 써주었었다. Reagan 이 대통령에 취임한 1981년에 이르러서는 Social Security 에 연방 총예산 21%가 쓰여젔으며 액수도 매년 3.5%씩 증가하고 있었다.

Reagan 도 막연하게나마 Social Security 가 심각한 지경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예산전문가 David Stockman 에게 이 문제의 해결책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Stockman 도 요술같은 해결책을 내놓을수는 없는 난제이 었었다. Reagan 은 대학교 에서 경제학을 전공 하였었지만 그방면에 눈이 어두었으며 그의 본성이 상세한 숫자계산에 서툴렀었다고 한다. Reagan 은 Stockman 의 연구보고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채로 자기 임기중에 Social Security 의 혜택을 삭감할수는 없다는 감상적인 생각이 들어서 혜택쪽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결국 Soocial Security Tax 만 대폭 인상하는 조치를 취할수 밖에 없었었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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