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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자정리(會者定離)

2019-09-17 (화) 이태상/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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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있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가 세상의 이치라면 우리는 어찌 살아야 할까. 생(生)과 사(死), 좋은 일과 궂은 일이, 영속되지 않고 다 지나가는 찰나이라면 우리가 그 무엇 또는 누구에게 연연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미신(迷信)을 보존한다. 믿어서라기보다 미신이 주는 이상야릇한 스릴 때문이라고 필립 개리슨(Philip Garrison)은 그의 에세이집 '점복(占卜 Augury)에서 말한다. 우리는 민속신앙을 존중한다. 그대로 믿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집단적 반의식적인 염원이다. 우리의 단조로운 일상생활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한 것이다.

우리 삶을 계획하기 위해 어떤 법칙과 규칙을 적용하든 말든 미신은 예측불허의 긴장상태에서 발생하는 흥분, 짜릿짜릿, 조마조마,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해준다.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해준다. 믿음과 사실은 서로 상반되는 것, 적어도 정반대로 어긋나게 맞서는 것이 아니고, 에둘러 상호 보완한다. 예측가능성에 싫증난 우리는 예측불가능의 세계를 동경한다. 우리 믿음의 일면조각들로부터 미루어 점쳐볼 수 있는 미지의 세계를....


한때 저 명왕성이 해왕성과 연관관계를 맺듯 한 별의 궤도 또는 그 궤도의 어떤 불규칙성이 천문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보지 못하는 다른 별들의 존재와 위치를 추측, 추리할 수 있게 하듯이. 나이를 먹을수록 온갖 민속신앙이 내 머릿골 속에 박히는 것 같다. 내 사고의 주위로 온전히 자리 잡으면서,이 괴상망측한 고풍(古風)의 유령들이 인생과 예술 사이로 너울너울 춤추며 떠도는 것을 바라보노라면 나는 혼미한 황홀지경에 빠진다.

우리가 사실의 풍경화 속에 살고 있으나 그 상대화(相對畵)인 믿음의 세계로 끌리는 유혹을 피할 길이 없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밥도 먹지만 꿈도 먹고 사는 게 사람이기에 예술인과 더불어 목사, 무당, 신부, 중, 점쟁이 종교인들도 밥 벌어먹고 살 수 있나 보다.

1980년대 나도 이런 점쟁이의 밥이 되어 본 일이 있다.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 거리를 지나다 호기심에서 타로(tarot) 카드 점을 본 일이 있다. 어려서부터 별나게 호기심이 많은 데다 어떤 일이고 미리 판단하고 단정해버리지 않고,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 또는 고정관념도 갖지 않으려고 애써온 까닭에서였으리라.

“당신이 원해 추구했더라면 그 어떤 명예나 권력도 잡고 재산도 크게 모았을 사람인데 당신은 그따위 것엔 전혀 상관없이 참사랑(true love)만을 찾아온 낭만주의자요 이상주의자야. 멀지 않은 장래에 당신이 평생토록 찾아온 당신 영혼의 짝(soul-mate)을 만나게 될 것이야. 당신은 돈이 많지도 않고 없지도 않지만 언제나 당신 쓰고 싶은 만큼 쓰고 살 운명을 타고 났어. 그리고 당신은 여행을 좋아 하며 음악을 늘 즐겨 듣지. 게다가 당신은 당신이 보스가 되어야지 다른 사람 밑에서는 일 못하는 사람이야.”

그 말도 그럴 듯 했다. 하기야 그 누군들 안 그러랴. 선택의 자유와 여유가 있다면야. 하지만 미신이든 신앙이든 믿음은 믿음이고, 환상이든 몽상이든 꿈은 꿈이다. 스스로의 과대평가가 어리석다면 그 반대로 과소평가는 그 더욱 어리석고 안 좋은 일일는지 모르겠다. 미국의 정치가이며 과학자이고 문필가인 벤저민 프랭클린이 그의 자서전에서 말한 것 같이 자만심을 극복하겠다고 겸손하다는 교만을 부리게 되어서는 안 될 테니까.

누구나 자기 자신부터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남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으며 나 자신이 대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요, 내가 숨 쉬는 순간순간이 영원의 축소판인데 그 어찌 나 자신과 순간순간의 내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이태상/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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