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72)제40대 Ronald Reagan 대통령④

2019-09-16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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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gan은 1968년에 Nixon과 맞상대로, 1976년에는 Ford와 맞상대로 공화당 대통령 후보공천에 나섰다가 실패했었는데 1980년에 George Herbert Bush와 경쟁끝에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공천된후 Bush를 부통령후보로 영입했다.

미국 동부의 주요 언론들은 Reagan 후보를 “남부” 출신의 Johnson이나 “서남부” 출신의 Nixon처럼 강력하게 혐오하지는 않았었지만 그를 “괴짜, 외부인사, 극렬분자, Goldwater 복제판” 등이라고 좋지 않게 평가 하였었다. 1980년 8월 까지만 해도 여론은 Carter가 별로 어렵지않게 Reagan을 낙선시킬 것이라고들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선거유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두번에 걸친 TV Debate가 끝난후 부터 대세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TV Debate에서 Carter가 몹씨 긴장한 모습을 보인채로 서툰 연설로 곤욕스러워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던 반면에 Reagan 은 토막 농담을 섞어가며 미소를 짓는 얼굴로 여유있게 연설을 하였다. 그는 후일 그의 임명으로 명 FRB의장이 되는 경제학자 Alan Greenspan 이 자신의 제안에 따라 작성해준 예산정책을 그 특유의 쉬운 말로 잘 풀어서 설명해 나갔다. Carter의 치하에서 국제정치불안, Iran 인질문제, 고금리, 유류부족, 불경기등을 경험해온 미국민들에게 Reagan은 대안을 잘 준비하고 있는것 같은 후보로 보였었다고 한다. Reagan은 토막 농담들을 아주 많이 알고 있었으며 그런 농담을 적시적소에 쓰는 임기응변의 재치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선거운동때와 대통령 재임시에 농담으로 사람들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꾸어 놓는 경우들이 자주 있었었다.


1980년의 대선때에 Carter와의 TV Debate에서 “경기불항(Recession)은 이웃집 친구가 실직한 것이고 공황(Depression)은 자신이 실직한 것이며 경기회복(Recovery)은 Carter가 실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라고 언중유골의 농담을 해서 청중을 웃기고 동시에 Carter를 제압했었다. 1984년의 재선 출마 TV Debate에서는 Carter 대통령의 부통령이 었었던 Walter F. Mondale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부통령후보 이었던 New York의 Geraldine Ferraro하원의원과 경쟁을 하게 되었었다.

TV Debate 에서 Reagan의 능글맞은 언중유골로 Mondale이 자신보다 몇살 아래임을 빙자하고 경력도 “부통령”밖에 못했던 것을 빗대어서 “나는 민주당 후보의 연령 미숙이나 공직경력이 다소 모자란다는 약점을 이번 선거에서 악재로 이용하지 않겠읍니다” 라고 말해서 Mondale 후보까지 웃기고 청중들의 환호를 받았었다.

1981년 3월 30일에 Reagan은 정신이상자 John Hinckley의 총격으로 탄환이 심장에서 12cm 떨어진 곳을 관통하여 미국 대통령중 유일하게 총격을 받고도 생존한 대통령이 되었었다.

헌법에 규정된 대로 Bush 부통령에게 대통령 권한을 몇 시간 위임한후 wheelchair 에 실려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의료진에게 “모두들 공화당원들이 겠지요!” 라고 능청을 부릴 정도로 sense of humor가 있었다고 한다. 그 저격때 Reagan의 옆에 서있던 백악관 대변인 James Brady도 총격을 받았는데 그는 사망 하였었다. 대통령 재임시 어느 기자가 짓궂게도 Reagan이 B급 배우이 었을때 침판지 Bonzo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가지고 와서 싸인을 해달라고 하자 “I am the one with the watch!” 라고 써서 서명해 주었다고 한다. 다른 대통령이 었다면 기자에게 “너무 당돌하다” 라고 짜증을 냈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그의 자제력이 어색한 순간을 순조롭게 넘기도록 하였었다.

Reagan은 낮에 잠간씩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어서 “게으르다” 라는 소문이 돌자 그는 “It’s true hard work never killed anyone but I figure why take the chance!” 라고 농담으로 받아 내었었다고 한다.

Reagan은 Rhetoric, Personal Relations, Homework 라는 세가지의 “자산”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Great Communicator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자신의 의사를 아주 쉬운말로 청중에게 전달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필요한 사람들과 좋은 유대관계를 유지할줄 알았었다. “공화당 대통령” 과 “민주당 하원의장”은 생리적으로 관계가 껄끄럽도록 되어있다. Reagan이 대통령때에 국회는 Boston 출신의 민주당 Tip O’Neill 하원의장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Reagan 은 자주 O’Neill 에게 “퇴근길에 한잔 같이 하십시다” 라고 그를 백악관으로 불러서 cocktail 을 나누며 환담 하였었다고 한다. 막상 만나서는 잡담정도만 나누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두사람의 상면 소식이 언론에 gossip으로 나오는 것은 결코 Reagan 에게 손해나는 일은 아니었었다.

배우들은 감독의 지시대로 연기해야 하고 대사도 잘 외어 두었다가 자연스럽게 말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Reagan 은 충실한 참모들과 보좌관들을 두었었으며 그들의 건의와 조언에 “배우”처럼 귀를 기울었었다고 한다. Homework을 열심히 하였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자회견을 하다가 기억력이 가끔 상실되는적이 있었으며 어떤 문제는 잘 알지 못하고 있거나 혼동하고 있는것도 가끔 나타 났었지만 그런 일화들이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되지는 않았었다. 그는 이러한 당황스러운 순간들을 농담으로 잘 넘기는 재주가 있어서 도리어 “본성은 참 순박한 사람” 이란 인상을 주기도 하였었다.


1980년의 총선에서 Carter는 1932년 Hoover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한 이후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 되었다. Reagan이 Carter를 landslide로 압승한 것이었다. Reagan 은 4,390만표를 받았는데 Carter 는 3,550 만표를 받는데 그쳤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공화당 대선공천에서 경쟁했던 Illinois 주의 John B. Anderson 하원의원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572만표를 받아서 공화당표가 분열되었 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온 결과 였었다. 선거인단 표수는 Reagan 이 489표, Carter가 49표 였었다.

Reagan은 미국 대통령 역사상 각계각층의 지지를 넓게 받은 인물이라고 한다. 남녀성별, 연령별, 직업별, 소득별, 지역별 등의 구분이 없이 절대 다수의 지지를 받았었으나 흑인들과 유태인들의 지지는 많이 받지 못하였었다고 한다.

Reagan의 성격에는 서로 달라보이는 여러가지 측면이 있었던듯 하다. Carter는 자신이 정장대신 sweater를 입고 연료 절약을 위해서 다소 싸늘하게 난방 도수를 낮춘 집무실에서 사무를 보았었는데 Reagan은 대통령 사무실인 Oval Office에 올 때에는 반드시 정장을 했었다고 하며 백악관 직원들에게도 제복처럼 정장을 하도록 하였고 백악관 경비 직원들도 제복을 단정하게 하고 군대처럼 점검을 받고 근무교대 의식도 하게 하였다고 한다.

미국 국민들 중에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와같은 외식적인 복식을 하고 행사를 하는것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반면에 미국군인들은 그런 절차를 환영 했었다고 하며 백악관을 방문한 외국귀빈들 중에도 좋은 인상을 받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Reagan에게는 소시민적인 따뜻한 측면도 있었던듯 하다. 대통령에게 오는 수많은 편지들 중에서 담당직원이 골라주는 편지들을 다 읽어보고 가능한한 답장을 해주었었다고 한다. 측은한 편지를 읽으면 따뜻한 격려와 함께 소액의 개인수표를 동봉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는 종종 사고를 당한 사람, 전사상한 군경의 가족들등에게 전화로 위로 하였었다고 한다. 다른한편 그의 “위엄 (?)” 때문이었던지 측근의 직원들은 그를 어려워 하였었다고 한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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