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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깻잎 솎아내던 날

2019-08-14 (수)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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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도록 비가 소리치며 내렸다. 가뭄에 단비라더니 아침햇살을 받은 초록이 한층 영롱해 보였다. 들깨 씨를 흩뿌려 둔 텃밭에 큼직한 동전만한 깻잎 순이 가득 출렁거렸다.
아름답다고 느낀 건 잠깐. 며칠 등한한 사이에 잎들이 빽빽하게 들어차서 옴짝달싹 못하고 서로가 서로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었다. 자기가 뽑혀나갈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지 숨통을 트여달라고 아우성인 것 같았다. 반나절 걸려 솎아내자 내 속이 후련해질 만큼 깻잎 사이가 헐렁해졌다.

나는 명확한 근거나 공평한 기준도 없이 그 주위에서 가장 크고 괜찮아 보이는 것만 남기고 적당히 뽑아 버렸다. 그러면서도 순한 웃음과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들 앞에서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일축해 버리기에는 푸른 눈빛이 진지하고도 간절해 보였다.

고만고만한 것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으면 마치 형제나 자매 같았고, 둘이 붙어 서있으면 사랑하는 연인처럼 보였다. 그걸 갈라놓자니 못할 짓을 한다는 느낌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늦둥이로 태어나 이제 겨우 목을 내민 아기 깻잎은 좀 더 놔두면 늦게 트인 아이처럼 나중에 잘 자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다려 주지 않고 성급하게 싹을 잘라내는 것 같아 오므린 손가락이 펴지질 않았다.


나의 미련과 집착 때문에 제때 솎아내지 못해 작년에 상추 재배에 실패한 경험을 떠올렸다. 그 덕에 마음을 독하게 먹고 솎아낼 수 있었다. 무작정 살려둔다고 선의나 배려가 아니었다. 대체 나는 어쩌자고 식물에 인성을 부여해서 갈등을 자처하는지.

해야 할 일은 마땅히 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마땅히 하지 않는 것이 순리(順理)이다. 비록 생명을 걷어내는 일일지라도 나의 행위는 순리를 따르는 일 아닌가. 먹거리는 먹거리일 뿐이고 솎아주는 일은 생산을 늘리는 효율적인 방법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나의 이성은 말하고 있었다.

씨앗에서 움틀 때부터 숱한 흔들림 끝에 겨우 얻은 자립과 안정일 터인데, 느닷없이 뽑혀나간 것들이 숨이 죽어 금세 생기를 잃고 늘어지는 걸 보니 나의 중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어느 날 체육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 이름을 부르더니 방과 후 체육관에 모이라고 했다.

뭘 잘못했을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지명된 학생들이 농구부로 훈련을 받게 된다는 거였다. 아마 키가 큰 학생들을 무작위로 뽑은 모양이었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큼이나 겁이 나고 싫었지만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결국 무리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중단해야 했다.

그때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며 깻잎을 솎아내는 내 손은 마냥 더뎌졌고 솎아내지 않고 못 본 척 놔둔 게 꽤 됐다. 나의 미지근한 태도가 결국 모두를 온전한 깻잎으로 키우지 못하게 될 수도 있지만 후회는 없을 터. 좀 작게 자란 깻잎을 조금 덜 먹으면 될 일이다. 어떤 일에도 기준을 정하지 말고 기대도 하지 않고 살면 덜 불행하고 덜 괴롭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기준과 기대를 낮추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건 무슨 이유일까.
너무 가까이 있어서 서로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 식물의 경우만은 아니다. 식물 사이에 햇빛과 바람이 다녀갈 공간을 두어야 하듯이 인간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적정 수준의 거리는 필수이다. 부부 사이도, 부모자식 간에도, 친구 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은 스스로 거리를 조절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식물은 제 스스로 자리를 옮길 수 없게 붙박이로 태어난 이상, 잘 자라게 하려면 텃밭 깻잎처럼 누군가의 손길로 솎아줄 필요도 있다. 야생에서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자연의 질서가 모든 것을 관장한다. 이럴세라 저럴세라 망설이거나 정에 이끌려 봐주는 예외를 기대할 수 없는 자연 세계에서는 스스로 강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

확실치 못한 나의 판단 덕분에 용케 살아남았을 깻잎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세상 모든 일이 무 자르듯 단칼에 판가름할 수도, 거침없이 명쾌할 수만도 없지 않는가.

걱정 반 기대 반, 앞으로 내가 텃밭을 드나들 때면 애정을 갖고 눈 여겨 보게 되리라. 보란 듯이 잘 자라는 것으로 깻잎이 보여주면 좋겠다. 때로 정에 이끌려 틀을 좀 벗어난다 해도, 그다지 잘못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미지근한 사랑도 사랑이라는 것을.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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