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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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68)제39대 Jimmy Carter 대통령⑦

2019-08-12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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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대의 차량들이 공기를 오염하는 대도시들에는 Smog (Smoke and Fog) 이라는 현상이 자주 발생하였다. 자연히 정부는 자동차 엔진의 배출구에서 유해물질들이 나오지 않도록하는 장치를 하도록 규제할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새 장치들은 엔진의 효율성을 떨어트려서 gas mileage 가 내려갈 뿐만아니라 자동차의 제조 원가가 상승하게 되어서 Inflation 을 자극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미국은 자본주의로 본격적인 공업선진국가가 되어가는 과정내내 “산업”을 우선할 것인지 아니면 산업화 과정에서 파괴되어가는 “자연환경보호”를 우선할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하여 왔었다. 이 고민덩어리는 선거때마다 중요한 쟁점이 되어오고 있으며 대통령이 바뀔적마다 정부의 정책도 변경되기가 일수이 었었다.

“자연보호” 우선의 격렬한 논쟁은 거의 주기적으로 뜨겁게 계속되고 있다. 한예를 들자면 Alaska 주 대부분을 국립공원으로 만들어서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과 Alaska 는 석유, 광석, 목재, 어업을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결론을 못낸채로 국회에서 논쟁이 되어오고 있다. Carter 는 자연보존정책을 지지하였었다.


석탄과 석유가 공통적으로 심각한 환경파괴를 하고 있었다면 그 대비책은 무엇이었을까? 자연히 원자력발전으로 눈을 돌릴수밖에 없었었다. 그때까지 20여년동안 별 사고가 없이 원자력은 미국의 전기소모량중 12% 를 공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까지도 발전연료 로는 이미 완전히 쓰여졌지만 방사선을 계속 발사하고 있는 Uranium 을 안전하게 폐기 시키는 기술이 개발되지않아 그것들을 깊은 땅속에 “임시로” 묻어두고 있다. 원자력발전은 8년전 일본의 Fukushima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포함하여 러시아의 Chernobyl, 불란서 등에서도 완전히 안전할수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 불안정하고 위험한 대체연료이다. 그래서 한국을 포함하여 “탈원전”을 계획하고 있는 나라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라고 한다.

Carter는 해군복무 말기에 핵잠수함 승무요원으로 훈련받은 원자력을 잘 아는 대통령 이었었다. 그가 구상했던 Energy 대비책중에 원자력발전에 대한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서 1979년 봄에 Pennsylvania 주의 Harrisburg 근처의 Three Mile Island 에 있는 원자력발전소에서 무슨 사고가 나서 몇일간 많은량의 방사능이 방출되었을 것이라고 알려졌었으나 일주일후에 큰 사고는 없이 문제가 처리 되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고는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것과 같은 효과가 있었다. 특히 원자력발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자극하여 격렬한 반대운동들이 시작 되었었다. 그들은 새 원자력발전소의 건설이 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운영중인 원자력발전소로 들어가는 통로를 막아서 운영을 방해하였었다고 한다.

Carter 는 취임 첫해인 1977년에 여러군데에 분산 되어있던 Energy 담당부서들을 통합하여 Department of Energy 를 신설하였었다. 국회는 Carter 의 요청이 있은지 18개월만인 1978년말에야 Energy 법을 입법하였으나 Carter 의 제안보다는 훨씬 축소된 것으로써 새로 발견된 Gas 는 정부의 가격통제를 받지 않도록 하였고 전기발전에 석탄을 쓰도록 권고하였으며 연료절약을 장려하기 위한 감세등이 포함된 정도의 미흡한 것이었다.
그러던차에 또 Carter 의 Energy 정책수립을 매우 어렵게 만든 사태가 일어났다. 1979년에 Iran 에 Islam 교 주도의 국민혁명이 일어나서 친미주의 Shah 가 퇴위를 당한 것이었다. Shah 는 미국의 대쏘련 방위를 위해서 공군기지들을 제공 했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착실하게 석유를 미국에게 공급해 왔던 것이다.

Shah의 실각과 함께 Iran 의 일부 산유시설들이 파괴되기도 하였고 미국은 가장 중요한 석유수입원이 없어져버린 것이었다. OPEC 는 Iran 사태를 기다리고 있었기나 했던것처럼 석유가격을 더 인상시켰었다.

Carter 는 미국역사상 가장 막대한 정부의 자금과 자원을 Energy 정책에 동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는 1990년까지 석유수입량을 절반으로 줄이도록 하고 대량의 인조연료가 생산될수 있도록 하며 태양열과 원자력을 이용한 발전을 추진하며 Energy 를 절약하는 program 들을 시행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인조연료를 생산하는, 숨겨진 자연 gas 를 탐색하는, shale (혈암) 에서 석유를 뽑아내는 개인회사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Energy Security 공사를 설립할것을 제안하였다. 또 그는 새 Energy 시설공사가 정부의 허가절차 때문에 지연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Energy Mobilization Board 를 신설하자고 제안하였었다.


Carter 는 현재 96세로 미국 대통령중 가장 장수한 사람이다. 그는 학력은 미국 해군사관 학교를 졸업한 것이지만 독서를 많이 했었던것 같다.

그의 저서 30여권중에는 회고록, 시, 정치, 국제문제 등등 다양한 분야를 다룬것들 인데 특별하게 알려진것은 없는듯 하다. 그는 연설중에 성경을 가끔 인용하여 “설교” 같은 느낌도 주었다고 하며 기독교인임을 자주 내세워서 “자기가 정직한 outsider 이라고 선전” 하는것이라고 반대자들의 비꼬움도 받았었다. 그가 선거운동중 Playboy 잡지와 Interview 를 하면서 비교적 솔직한 얘기들을 하여서 그의 소박한 인간 됨됨이가 소개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질문에 대답하던중 “나도 젊었을 때에는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가슴이 움직이었었고 마음속으로는 여러번 ‘간음’을 한적이 있다” 라고 얘기한것이 여과없이 보도되자 그를 일반적으로 지지했었던 기독교계의 강력한 비난을 받았었다. 그의 어리석어 보였을 정도의 “솔직함” (정직?) 이 문제이었던지 “정치훈련”의 미숙이 문제이었던지 아니면 독자들의 동상적인 “위선”이 문제이었던지는 한번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그는 외골수 같은 성격이 있었던 모양으로 국내외에서 정치적 타협을 잘 하지 않았었던것 같다. 그는 대통령취임 이틀만에 국론의 화합을 위해서 월남전쟁중의 모든 병역기피, 탈영자들을 전면 사면하여 주었으며 정치적 손해를 감수 하면서도 우방, 적대국을 상관 할것없이 전세계가 인권을 존중할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었다.

그는 Iran 의 인질사태로 1979-81 동안 시련을 받았으나 쉽게 타협하지 않았었다. 쏘련의 인권탄압을 비난해 오던중 쏘련이 Afghanistan 을 침공하기 시작하자 미쏘관계가 다시 냉전으로 들어갔고 Carter 는 쏘련으로 미국의 곡물수출을 금지시켰고 1980년의 Moscow Olympic 에 미국이 참여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다른 나라들에게도 불참할것을 권고 하였었다고 한다.

Carter 는 1981년 1월에 대통령직을 퇴임하고 나서도 적극적인 국제평화 정치활동을 계속하여 왔으며 그업적도 많았던 까닭에 2002년에 Nobel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1982년에 The Carter Center 를 설립하여 전세계 80여국의 인권보호를 위해서, 인생의 고난을 줄이기 위해서, 삶의 질을 올리기 위해서 진력하였던 공로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는 분쟁국가들을 방문하여서 중재를 하였었고 후진국의 공정선거를 감시하였으며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서도 노력을 하였었다. 북한을 방문하여서 김정일과 회담끝에 미국인질 두명을 데리고 오기도 하였으며 근년에는 Trump 대통령에게 자신을 세계평화를 위한 특사로 써 줄것을 제안하였으나 받아 드려지지 않고 있다고도 한다. 대통령 재임시보다 더 활동하고 있는듯 하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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