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탯줄 끊어주기

2019-07-2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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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유불급이라고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말이 있지만 어쩌면 지나침은 못 미침보다 못한 것 아닐까.

언젠가 한 일간지 모 언론인이 그의 고정 칼럼에서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우리 속담과 쉘 실버스타인의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 (The Giving Tree) ’를 인용한 후 인간은 자신의 부모들에게서 얻은 것을 반이라도 아니 반의 반이라도 돌려줘야 한다는 채무의식을 갖게 될 때 내리사랑과 치사랑의 본질이 뒤바뀐 현주소에 긍정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좀 달리 생각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의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과잉보호하고 특히 아들들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의존적인 생병신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다.

자식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몰라도 일단 세상에 태어난 다음에는 한시 바삐 육체적인 탯줄뿐만 아니라 심리적, 정신적 탯줄까지 끊어줘 자식들로 하여금 하루 속히 엄마 품과 둥지를 떠나 혼자 나는 법을 배워 자신의 삶을 제 힘으로 스스로 개척하도록 격려할 일이지, 그렇지 않고 좀 심하게 말해서 엄마 뱃속에 자식을 다시 집어넣으려 들면 자식이 숨통이 막혀 질식하지 않겠는가. 본인이 원치 않는데도 자식에게 어떤 학문, 어떤 직업, 어떤 배우자를 강요하는 부모들이야마로 자식을 사랑하고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로 자식을 해치고 망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태상<자유기고가>


나는 영국에 살 때 크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영국 엄마들은 길을 가다가 어린 자식이 넘어져도 잡아 일으켜 주지 않고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보고 한국 엄마들의 무지몽매함을 통탄 한 적이 있다. 몇 년 전 나는 뉴욕에 사는 어떤 한국 엄마가 대학 다니는 두 아들이 학교 서류에 제 때 제 자리에 제 이름 사인조차 못할 까봐 사인까지 대신하고 저희들이 포르노성인 비디오를 빌리기 얼굴 뜨거워할까봐 자기가 대신 빌려다 주는 정신병자 같은 경우를 본 일도 있다.

사람은 앞을 보고 살라고 눈이 얼굴에 달렸지, 뒤통수에 달려 있지 않은데 동양의 유교사상 때문인지 우리는 앞을 보고 달리는 대신 조상이다, 부모다, 효도다 뒤만 돌아보고 살아왔으니 발전은커녕 퇴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발 부모자식 사이에 채권자 채무자 같은 억지 그만 좀 부릴 일이다. 부모 자신이 좋아서 재미보다 낳은 자식, 키우는 낙으로 키웠으면 그만이지, 어쩌자고 자식더러 뒤만 돌아보고 뒷걸음질하라는지, 이러한 한국의 부모들이야말로 고려장 감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어버이다운 어버이라면 자식보고 제 좋은 일 하라고 축복해줄 일이지, 하고 싶은 일 말려서도 안 되지만 하기 싫은 일 시켜서도 안 되리라.
하기 좋은 일만 하기에도 너무 짧은 인생인데 어쩌자고 하기 싫은 일로 인생을 낭비하고 허비하란 말인가.

모든 부모님들이 꼭 좀 기억하고 한시도 잊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니고 어린이들에게는 어른들이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천부적 지향성과 자생력이 있기 때문에 앞서가는 애들보고 동으로 가라 서로 가라 할 일이 아니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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