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새벽, 걷기운동 하려고 나섰다. 얼마 전 내가 개발한 동네산책로에서다. 어느 집 앞 인도에 요구르트통과 일회용 컵에 심겨진 모종들이, 알루미늄 큰 컨테이너 3개에 쭉 담겨있다. 바로 앞 가로등엔 ‘집에서 키운 오개닉(Organic) 모종들이 후리니까 가져가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옆에 플라스틱 통 안엔 ‘컨테이너 째로 들고 가지 말고, 모종용기들은 돌려 달라’는 작은 사인 판도 꽂혀있다. 과연 미니화분 용기들이 옹기종기 흙 묻은 얼굴로 되돌아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타인들 간에 이루어진 무언의 신뢰와 소통의 현장이다.
용기마다 바닥에 구멍들이 뚫려있고, 정성스레 손 글씨로 메모한 스티커도 붙어있다. ‘Roma Tomato 4/20/19’ 이런 식이다. 친절하게도 파종한 날짜의 정보까지 제공하니, 감동이다. 가지와 피만 스티커통도 제법 보이는데, 아쉽게도 남아있는 모종들은 전부 토마토다. 이틀 동안 산책을 생략한 바람에 거의 끝물에나 동참하게 된 셈이다. 토마토모종들을 살펴보니 잎과 줄기색이 조금씩 다르고, 키도 작달막하거나 껑충하거나 그렇다.
이름들을 보니 Sun gold, Yellow pearl(노란 진주), Brandy wine, Firebird sweet(달콤한 불새), Heirloom(조상전래의 가보)등등이다. 여태껏 슈퍼에서 파는 방울(Cherry)토마토나 플럼(Plum)토마토, 줄기토마토인 Beefsteak, 그리고 일반적인 토마토인 Classic red slice 이름이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토마토종류가 이렇게 다양하고, 또 이름들이 하나같이 예쁜지도 몰랐다. 이름만 보고는 어떤 열매가 열릴지 나로선 도통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제일 마음에 드는 이름인, 빨간 울새 Red robin과 환희라는 뜻의 함축성에 매료돼 Jubilee로 골랐다. 우산 때문에, 한 손으로 두 개만 들고 오는데도 행복감으로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런 흔치않은 선행을 베푸는 걸까? 아마도 은퇴한 사람이지 싶다. 어쩜 식물 육종학자 출신? 자연생태를 주창하는 자연보호주의자인가? 대대로 농부집안인가? 그저 머릿속으로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집주인을 본 적도 마주친 적도 없으니까.
얼른 모종을 이식하고는, 빈 용기와 마침 컵 화분과 같은 집에 있던 컵들까지 담아서 다시 갔다. 우중에다 시간이 일러선지 남은 모종들 개수도 그대로고 사람들의 왕래도 없다. 그래서 ‘떡 본 김에 제사 지내자’ 하고는 백에다 5개나 담아 동네 친구 집에도 분양했다. 빈 통을 다시 갖다 줘야 해서 세 번째로 ‘그 집 앞’엘 갔다. 비 맞는 모종들의 모습이 좀은 처연해 보였다.
이처럼 비 오는 날엔 모종들이 비좁은 집에서 이사하기 딱 좋은데. 몸살커녕 빨리 안착해서 기를 펴며 확확 자랄 텐데. 문득 산행팀원들이 다 ‘초록 손’들이라 잘 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산행 팀 몫으로 5개를 또 담았다. 실은 세 번째는 진짜 빈 화분만 리턴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모종들 앞에서니, 또 욕심제동불능이다. 어쩌겠나!
그다음 팻말과 남은 모종들을 사진에 담았다. 이집 주인들의 아름답고 따스한 인간미가 감동으로 전해져서다. 요구르트를 먹을 적마다 모았을 그 마음. 하나하나 못으로 구멍들을 자잘하게 뚫은 섬세한 정성. 일일이 흙을 담고 씨 뿌려 애지중지하다가, 딸을 시집보내듯 애틋한 마음에 스티커까지...
다음날 아침, 산행팀원들한테 행복모종을 돌리곤, 그 집엘 다시 가봤다. 마치 파장된 장터인양, 남은 모종들과 팻말들은 흔적도 없이 싹 치워졌다. 새삼스레 그 집을 눈여겨보니 예상대로 잔디밭에 잡초하나 없다. 화단도 다양한 꽃나무들과 정원장식 소품으로 아기자기하다. 나무들도 트림이 잘 돼있고 어린나무들은 보조대를 착용했다. 식물을 사랑하는 마음과 정성의 손길이 요모조모로 스며있다. 조경전문가들 솜씨보다 더 친근히 다가오는 연유다.
그때 문득 머리를 친 생각! 아! 이런 게 바로 미국인의 진수(眞髓)구나! 생면부지의 타인들에게 무조건하고 베푸는 재능과 시간의 순수한 기부! 어느 한 개인(아니면 부부)의 작은 ‘행복나누기’ 솔선시범이야말로, 사회에 기부하는 덕목인 미국 ‘기부문화’의 근간일 터! 결국엔 이런 작은 기부정신과 실천들이 모여 ‘미국을 위대하게’ 만드는 실질적인 힘이 되는 거란 확신이 들었다.. 비록 ‘아메리카를 위대하게’라는 트럼프대통령의 외침은 공허하게 들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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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숙 /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