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익살 그룹이 1,000회의 기념공연을 하였다는 소식이 반갑다. 여기서 두 번에 나누어 방영된 GAG 콘서트 1,000회의 공연을 텔레비전으로 보았다.
우선 출연인원과 관객이 많은데 놀랐다. 또한 출연 내용이 다양하여서 색다른 익살스러움에 흠뻑 젖었다. 무대 위에서 쏟아내는 열기에 균형을 잡은 관객들의 맞장구가 볼만 하다. 가끔 관객들은 그 수효와 뜨거운 호응으로 무대의 위아래의 관계를 허문다.
자연스럽게 다음 주말에도 그 프로그램을 보았다. 반복되는 내용이 거의 없고, 새롭게 추가된 아이디어에 끌리면서 바로 이런 재미에 1,000회를 이어왔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렇게 이어지는 익살의 재미는 그 원천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 단체의 작은 그룹의 활동에 주목하였다.
그 많은 작은 그룹들은 제각기 다른 익살의 원점과 줄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출연시기가 바뀔 때마다 이어지는 작은 제목으로 원줄기에 가지를 친다. 그래서 새로운 이야기가 샘솟는다. 이런 그들의 노력이 연출하는 다양한 아이디어와 열기를 보고 있으면 색다른 익살에 끌리게 된다.
이런 선의의 경쟁은 작은 그룹들이 지혜를 모으며 다양한 모습으로 두뇌의 활동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그 많은 관객들이 꾸준히 참가하는 이유도 출연자들의 열외에 정비례한다. 이런 현상은 무대 위와 아래의 구별이 없이 그 때의 분위기에 따라 열을 높인다. 또한 이것을 보고 있는 TV 관객들도 휩쓸리게 된다.
솔직히 여기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내게는, 오고 가는 말의 의미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듣는 재미는 있다. 누가 창안하였는지 익살스러움을 발휘하면서 서로 다투는 생각이 기발하다. 우리들이 익살스러움을 즐기는 생활은, 삶을 즐기는 하나의 지혜라고 본다.
서로 다투다가도 사소한 익살 때문에 웃기도 한다. 한국인은 감정이 풍부하고 익살스러움이나 유머를 사랑하는 섬세한 감정 표현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익살콘서트와 사회와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밤낮으로 일하는 사회는 몸과 마음이 몹시 피곤하다. 그런데 익살 콘서트가 주는 웃음은 훌륭한 중화제 역할을 한 것이다.
만약 이런 웃음의 중화제가 없었더라면, 각종 일에서 오는 심신의 피곤함으로 조금이라도 덜게 되었을 것이다.
피곤할 때 생각한 것이 익살 콘서트였다면 얼마나 현명한 판단인가. 훌륭한 중화제를 발견한 것이다. 앞으로 같은 목적으로, 다양한 웃음거리를 한국에서 이어가기를 바란다.
하나의 의문은 이곳 미국사회에서 한인들은 충분히 웃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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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전 한국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