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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2019-07-10 (수) 나혜경/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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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문예

지난 6월 중순에 직장을 그만두고 실업자가 된 나는 동시에 자유인이 되었다.
매일 아침 눈 뜨면 어제 들고 온 가방을 둘러메고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출근길에 나서던 불과 며칠 전의 일상은 사라지고 실업자이자 자유인의 아침나절은 달콤하고 여유롭기만 하다.

늦도록 잠자리에 뒹굴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있나, 밤늦게까지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내일 밀어닥칠 피로감과 싸우면서 일할 생각에 불안해 할 일이 있나, 동료들과의 마찰과 충돌에 괴로워하면서 열 받을 일이 있기를 한가 말이다.

진전 없는 영어 실력이 조금이라도 더 들통날까 전전긍긍 구글선생님 댁에 불나게 드나들며 한 문장이나 단어 하나에까지 집중하면서 스트레스 받을 일도 더 이상은 없다는 사실이 나에게 평안을 준다. 직장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토록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었다. 자유인으로서!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새 직장을 찾고 있는 실업자로 분류되어 마땅하다. 비록 쥐꼬리만 한 금액이었지만 2주마다 따박따박 입금되던 주급이 더 이상 자취를 감추고 수입 없는 나날을 보낸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닌 것을 인정하자 나도 모르게 기운이 빠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영화 ‘베테랑’의 명대사인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는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가오’는 일본말로서 일반적으로 얼굴을 뜻하지만 체면의 뜻으로도 쓰인다고 하는데 영화 속에서는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자존심을 버리고 현실에 안주하거나 타협하는 일은 하지 말자는 뜻으로 통용되었다고 한다.

영화와 현실은 지극히 다르고 현실을 외면한 허세와 폼잡기는 보잘 것 없는 거품과 도피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쉬지 않고 오랜 기간 동안 마치 폭풍우 속을 지나온 듯 조금은 치열하다 말할 수 있는 인생의 한 정점에서 내려와 나는 지금 잠시 숨을 고르는 자유인의 마음으로 서 있다고 할까?

나이가 지긋하신데도 현역 직장인의 자리에서 물러날 줄 모르고 열정적으로 일하시는 어르신께서 조금 더 일 할 수 있으니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윗사람이 허락을 하지 않는다고 실망스러워 하셨다.

그 몇 시간을 더 달라고 자기보다 훨씬 어린 윗사람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어렵게 말을 꺼냈을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으이구!” 하는 한탄이 나왔다.
이럴 때 적용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권사님,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요?” 라고 질책하고 말았다.

6월 말까지 유효하다는 보험의 혜택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 7년 만에 유방암 검사를 받았는데 검사 결과 7년 전의 유방조직과 달라 보이기 때문에 한 번 더 검사를 받고 필요하다면 초음파검사까지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건강에 대한 나의 무심함이 그 어떤 불행한 결과를 낳는 건 아닐까 하는 일말의 두려움을 안고 기계가 이끄는 대로 모든 절차를 마친 후에 아무 이상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요양원 입주자 노할아버님이 떠올랐다.

정기적으로 키모 치료를 받으시는 그 분을 모시고 방문했던 키모 병동의 수많은 암환자들은 내가 잠시나마 암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에 떨었던 것보다 상상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을 처연하게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무섭고 두려운 자기와의 맞닥뜨림이고 거역할 수 없는 사투이리라.

최근 한국 김동호 목사님이 폐암 수술을 하셨고 수술 후에 하신 설교를 듣다가 내가 언급한 영화의 명대사를 그 분 역시 좋아하시고 믿음의 가오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시는 것을 들었다.

암환자가 되어 보니 이전에는 몰랐던 인생의 질고를 견디는 사람들에 대한 다른 해석과 공감을 체득하신 것이다.

젊고 패기만만하던 목사님의 까랑까랑한 음성의 설교도 좋았지만 고통과 아픔과 무서움과 두려움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와 맞닥뜨린 노 목사님의 설득력 있는 이해와 공감을 자아내는 설교는 더 좋았다. 우리는 인생의 질고 앞에서 “왜 하필 나에게요?”라고 묻지만 “왜 나는 안돼?” 라는 대답을 얻었다는 성찰은 얼마나 깊고 깊은가?

실업자가 되고 보니 광야에 나 혼자 서 있다는 실감이 난다. 사직하기 전에는 내 옆에서 조언과 간섭과 설득과 핀잔을 주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실업자가 된 그 순간 이후부터는 아무도 나에게 뭐라 말을 하지 않는다.

지금부터는 오롯이 나 혼자인 것이다. 고독한 맞닥뜨림이지만 자유로운 내 시간을 만끽하는 것은 달콤하다. 직장에 얽매여 운신이 어려웠던 탓에 못해본 일들, 하고 싶었던 것들, 가고 싶은 곳들을 찾아서 즐기면서 즐겁게 지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새 직장을 구할 때까지 당당할 것이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나혜경/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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