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63)제39대 Jimmy Carter 대통령②

2019-07-01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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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lian 은 남편이 별세한 후에는 대학교 기숙사의 사감도 7년여 했었다고 한다. 사회봉사 정신이 강했던 여성이었던 모양으로 68세에 Peace Corps 로 인도에 가서 21개월간 봉사하고 돌아왔는데 인도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아서 책을 만들고 자신의 자서전을 써서 Jimmy 가 대통령으로 재직하고 있던 1977년에 두건의 책을 출간 하였었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친절 하였었고 재치있는 말을 잘하여서 Jimmy 의 대통령 재임시절에 가끔 Lillian 이 한 witty 한 말들이 언론에 올라와서 미국사람들의 흥미를 끌었었다. 착실한 기독교 신자이었던 Lillian 도85세에 Pancreatic cancer 로 별세하였다.

Jimmy 의 첫째 여동생 Gloria Carter Spann 는 아들하나를 두었으나 남편의 폭행으로 친정에 와 있다가 아버지의 권고로 이혼 (annulment)하고 Walter Guy Spann 과 재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었다고 한다. Gloria 는남편과 함께 Motorcycle 을 타고 cross country cycling 에도 참가 하였다고 한다. 아들이 말성이 많았던 모양으로 Jimmy 가 대통령을 할때에 형무소에 있었다고 한다. Gloria 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었는데 나가던 교회에서 흑인의 출석을 금지시키자 교회에 항의하고 다른 가족들은 교회를 나갔었지만 자신은 집에 남아서 Bible Study Class 를 하였었다고 한다.


Jimmy의 두째 여동생 Ruth Carter Stapleton은 Evangelist 로 일했었다고 한다. Jimmy 가 “born again” Christian 이 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Jimmy의 14세 연하 남동생 Willy Carter 는 말썽꾸러기 Beer Drinker 로 소문이 나서 가끔 gossip 란에 올랐던 인물이다. 열여덟살에 결혼을 하고 Emory University 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해병대에 4년동안 복무하였다. Jimmy 가 대통령으로 재임시에 당시 미국과 앙숙이 었었던 Libya 를 세번이나 방문해서 20여만불의 대부를 받았었 는데 실은 백만불 이상의 “뇌물”을 받았었다는 소문도 나서 국회가 “Unregistered Foreign Agent” 라고 조사하기 까지 하였었다고 하며 결국 백악관이 “백악관은 Willy Carter 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Willy 가 대 Libya 미국의 정책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 라는 발표를 했어야만 하였었다고 한다. 고향인 소도시 Plains 시장으로 출마하였다가 몇백표 차이로 낙선도 하였던 Willy 는 Plains 에 맥주공장을 세웠었다. 50대에 가족의 유전병인 Pancreatic Cancer 로 사망하였다.

가족중 Jimmy 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부인 Rosalynn Smith Carter 인데 그녀 또한 “극성여성”으로써 시어머니 Lillian 과는 조금 불편한 사이었었 다고 한다. 그녀는 네딸중 첫째로 태어났었는데 Auto Mechanic 과 농부를 하던 부친이 그녀가 열세살이 었을때 사망하여서 온가족이 아주 어렵게 지냈었다고 한다.

그녀는 성장할때에 어렵게 지내었으나 그 시절에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가난 하게들 살았던 까닭에 자기 가정만이 특별히 어려웠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았 었다고 술회하였었다고 한다. Georgia Southwestern College 에 진학 하였었으나 학비의 조달도 어려웠었고 동생들을 데리고 혼자서 애쓰는 모친을 돕기 위하여 학교를 중퇴하고 집이 있는 Plains 로 돌아왔다.

그때에 친구의 오빠로써 미국 해군 사관학교 교복을 입고 찍은 Jimmy 의 사진에 매료 되어서 Jimmy 가 사관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그와 결혼을 하였다.

결혼후 해군 초급장교를 하던 남편을 따라 여러 도시로 옮겨가며 살았던 생활은 “촌뜨기”이었던 Rosalynn 에게는 안목을 넓혀주는 경험이었었다. 원래 해군을 career 로 계획했던 Jimmy 는 미국 해군 핵잠수함의 아버지라고 불리웠던 Hyman Rickover 제독 밑에서충실하게 수련을 받던 초급장교 로써 핵잠수함에서 복무할 예정이었었 다고 하며 Jimmy 자신도 그가 Rickover 제독으로부터 조직과 행정의 훈련을 잘 받았 다고 술회 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친이 일찌기 사망하자 땅콩농장을 계승하기 위하여 대위때 해군복무를 포기하고 고향촌 Plains 로 돌아오게되자 Rosalyn 은 대단히 실망 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맹열여성 다웁게 땅콩농장도 부부가 열심히 경영하였고 교육위원으로 부터 시작하여 남편이 주상원의원, 주지사, 대통령까지 될때에 Jimmy 의 partner 로써 충실히 활동 해왔다. Rosalynn 은 남편의 뒤를 다소곳이 따르는 반려자 라기 보다는 “Partner” 라는 용어가 더 어울릴 정도로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었고 주지사와 대통령 선거 때에는 Jimmy 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선거운동을 하고 다녔었다고 한다.


Jimmy 가 대통령이된 후에 남미와 기타 지역의 나라들을 미국 사절단 대표격으로 방문하였었는데 효과가 좋지 않았다는 비난도 들었었다고 한다. Jimmy 의 대통령 재임시에 Rosalynn 은 “대통령의 초청”으로 국무회의에 참석 하였었다고 한다.

그녀의 국무회의 참석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자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여론도 있었 으나 그녀는 회의에 참석하여 가끔 memo 는 하지만 일체 발언은 하지 않는다는 해명이 있었고 그녀 자신은 First Lady 로써 국정의 움직임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참석한다는 설명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국무회의 참석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녀는 국정 문제를 남편과 자주 상의한적은 있지만 남편의 판단에 개입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었다고 한다. 그녀의 분주하였던 일정을 다소 냉소적으로 집계 해본 The Washington Star 의 보도에 의하면 Rosalynn 은 Carter 의 대통령재임 첫 14개월동안에 외국 18개국, 미국의 27개 도시를 방문하였고 개인적으로 259회, 공식적으로 50번이나 각종의 회의에 참여하였으며 주요 연설을 15회를 하였고 기자회견 22회, interview 를 32회 하였고 공식 reception 에 83회 참석하였고 백악관을 방문한 단체들과도 23회나 회동하였었다고 한다.

그녀는 “신체장애자”들의 후원을 위한 입법과 제도의 개선을 위해 꾸준히 활동 하였었고 Jimmy 의 대통령 퇴직후에도 계속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후원해 왔었다고 한다.
Jimmy 는 Plains 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후 Georgia Southwestern College 에 입학 하였다가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로 전학하여 공부하다가 미국 해군사관 학교에 입학하여 졸업생 820명중 60번째로 졸업하였다.

해군을career 로 결정한 Jimmy 는 Rickover 대령 (후일 중장) 밑에서 착실하게 수련을 받아오던중 장차 그당시 건조되고있던 핵잠수함에 승무할 준비를 하고 있던중 부친의 사망으로 가업을 계승 하기 위하여 1953년에 해군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항상 맡은일에 성실하였던 Jimmy 는 첫해에는 손실을 보며 고전하였으나 농업서적들을 보며 노력을 하여 곧 성공적인 땅콩농장주가 되었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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