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60)제38대 Gerald R. Ford 대통령④

2019-06-10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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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에서 승패를 반복해오던 공천경쟁 끝에 1976년 8월에 열린 전국 공천대회에서 Ford는 Reagan 을 아슬아슬하게 물리치고 대통령후보로 공천을 받았었다. 그는 공화당 보수계의 압력에 밀려서 부통령후보에 Rockefeller 를 탈락시키고 보수파 중진인 Kansas 주의 Robert Dole 상원의원을 지명하였다.

그러나 Dole 의 선택은 대통령선거에서 기대 했던만한 효과를 얻지 못하였고 Ford 자신도 Dole 의 선택이 대선패배 원인들중의 하나이었을것 이라고 말했었다고 한다. Ford 는 불과 얼마전까지 “무명인사” 이었던 민주당의 Jimmy Carter 에게 1976년의 대선에서 아주 근소한 표수 차이로 패배하였다.

Nixon 의 대통령재임 말기 20여개월 동안과 Ford 가 대통령에 취임한후 초기까지 미국의 국론이 분열되었었고 미국의 경제 또한 불경기와 Inflation 으로 시달려 왔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동안에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이나 외교정책은 크게 국내정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일관적으로 지탱되어 왔다는 사실이 신통한 일이다. Nixon 초기때부터 Ford의 말기까지 국무부장관 을 했던 Henry A. Kissinger 의 공로가 컸었었다고 생각된다.


유태인으로 독일에서 태어난 Kissinger 는 Hitler 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서 그가 15세이었던 1938년에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 난민으로 이민을 왔고 미국시민이 되었던 1943년 부터 3년간 미군에 복무하였다. Harvard 대학교에서 수석으로 학사학위를 받은후에 역사학 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권위있는 저서들도 쓰면서 Harvard 대학교의 교수로 일하 였었다.

그는 강한 독일어 accent 를 버리지 못하여서 영어에 유창했던 Willy Brandt 서독 수상보다 영어는 서툴고 독일어는 더 잘했었다는 농담이 있었다.


Nixon 대통령은 그를 1969년에 국가안보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하였다가 1973년에는 국무부장관으로 임명하고 그를 측근으로 신임하고 외교를 전담하게 하였었다고 한다.
그는 Ford 대통령 아래에서도 국무부장관을 계속하였었다. Watergate 사건등으로 Nixon 이 곤욕을 치루고 있을때 유태교인인 그가 Quaker 교도인 Nixon과함께 기도를 하며 Nixon 을 많이 격려 하였었다고 한다. 그의 외교방법은 “비밀” 과 “shuttle” 이라는 특징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가 “전문외교가” 출신이 아니었던 점이 그의 강점이었을 수도 있었을것 같다. 그가 너무 숨돌릴 틈도 없이 일을하며 엉뚱한 곳을 갑작스레 많이 찾아다녀서 보좌관들과 기자들이 힘들었었다고 한다.

그는 쏘련과 detent 외교정책이 유지되도록 노력하였으며 중공을 비밀방문하여 Nixon 과 모택동이 상봉하고 양국간의 외교가 재개되도록 하였었다. 그는 오랜 협상끝에 월남전쟁을 종전한 평화협정을 맺었는데 그 공로로 1973년에 Nobel 평화상 공동수상자가 되었으나 월남측 대표인 Le Duc Tho 는 평화가 올때까지 수상을 거부하였었다고 한다.
Kissinger 의 중재로 1972년에 동서독이 상호 인정하는 관계가 되었고 1973년에는 양국이 함께 UN에 가입 하였었다.

Yom Kippur War 가 종전하자 쏘련과 협조하여 UN 안전보장 위원회를 통하여 UN 병력이 Egypt 와 Israel 사이, Syria 와 Israel 사이의 접경 지대의 완충지역을 지키도록 하였었다.

Shuttle Diplomacy 의 결실로 1975년에 미국 민간 전문가들이 중간에서 양쪽을 감시 한다는 조건으로 Egypt 와 Israel 은 완충지대도 더 넓히고 분쟁에 무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협정이 되도록 하였다.

대부분의 미국대통령들이 중동외교에서 거의 무조건적으로 Israel 만을 지지해온것에 비하면 Ford 는 상당히 중립적인 외교를 해보려고 노력 했었던것 같다.


1975년에 Kissinger 국무장관이 대화가 두절된 Egypt 와 Israel 사이를 왕래하며 화해를 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Israel 의 양보없는 강경한 자세로 성사가 되지 않는것을 보자 Ford 는 Israel 의 수상에게 “귀국의 강경한 자세에 대단히 실망하고 있읍니다. 앞으로 그러한 태도의 변경이 없으면 귀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재고 할수밖에 없으며 미국과 Israel 간의 친선에도 영향이 있게될 것입니다” 라는 의미의 전보를 보내서 Israel 에게 경고하였고 그후 6개월여동안 미국과 Israel 의 관계가 냉각상태로 들어 갔었다고 한다.

미국 국회와 정계의 친 Israel 계열 사람들이 총 동원되었고 전례없이 상원의원 76명이 서명한 편지로 친 Israwl 정책을 써줄것을 당부하는 청원서를 Ford 에게 보냈었다고도 한다.

Ford 는 짧은 재임기간 동안에 후일 미국의 정치를 주름잡은 공화당의 중진인재들을 여러명 등용하였다. 대통령으로 출마하기 위해 들석거렸던 George H. Bush를 주중 미국 대사로 임명 하였다가 CIA 부장으로 기용하였으며 Dick Cheney 를 대통령 비서실장 으로 기용하였으며 1976년의 실패한 대통령선거때 그를 선거사무장으로 썼었다. Donald Rumsfeld 를 미국사상 “최연소” 국방장관으로 임명하였었다.
Ford 는 LBJ 에 이어서 미국사상 두번째로 흑인 William Coleman 을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 하였었다. Ford 는 Nixon 의 각료들중에서 William Simon 재무부장관과 Kissinger 국무부장관을 제외하고는 전원 교체 하였었다.

1976년의 대선에서 별로 많지않은 표수차로 “억울하게” Jimmy Carter 에게 낙선 했다고 생각한 Ford 는 공식적으로는 서로 왕래도 하고 예절을 지키고 지냈으나 Carter 의 정책들에 불만이 있었었고 자신이 재출마하여 1980년에 Carter 의 재선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공화당 대통령공천에 나섰다가 중도에 포기 하였었다.

한편 공화당 온건파의 지지가 필요했던 공화당의 대통령후보 공천자 Ronald Reagan 은 Ford 에게 부통령 후보가 되어줄것을 교섭해 왔었다. Ford 는 Kissinger 를 국무장관으로, Alan Greenspan을 재무장관으로 임명하고 자신도 몇개의 부서를 관활하는 법률상에는 없는 Co-Presidency 를 요구하여 성사가 되지 못하였고 Reagan 은 George H. W. Bush 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었다고 한다.

대통령 퇴임후에도 비교적 적극적으로 원로정치인 역활을 하였었던 Ford 는 공화당 보수계와는 점차 거리가 멀어졌으며 “임신중절허용 찬성, 동성연애차별 반대, 전투용 총기허용 반대” 등으로 보수파 공화당과는 상반되는 견해를 발표하였었다.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선거를 통하지 않고 부통령과 대통령을 지낸 Ford 는 2006년 12월 26일에 별세 하여 93세165일로 최장수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Puerto Rico
미국에서 “여성차별” “흑인차별” 에 뒤이어 차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Spain 어를 일상용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Hispanics” 인데 그중에서도 특이한 입장에 있는 Puerto Rican 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보고자 한다.

Hispanics 에는 Spain 을 위시로 대부분의 Caribbbean 도서국가들, Mexico 와 중남미 국가들과 유일하게 Portugal 어를

쓰는 Brazil 을 제외한 남미 국가들과 멀리 비율빈에서 온 사람들까지 포함되는데 그중 60% 이상이 Mexico 출신으로써 대게 저소득층 지역에 모여서 살지만 Spain 어를 쓰며 본국의 문화, 전통, 건축, 음식과 음악등을 “자랑스럽게” 지키고 사는 사람들이다.
(계속)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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