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일면 사진을 보고 놀랐다. 거기에는 내가 잘 알고있는 사람이, 미국 대통령과 마주 앉아서 담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새 보기 좋게 성숙한 그의 모습을 한참동안 즐겁게 보았다.
한국내에서 두 연구학교에 각각 10년씩 모두 20년 동안 교직에 있다가 미국에 와서도, 다행이 내 그생활이 연장되었다.
1964년 말 뉴욕에 왔을 때, 맨하탄에 있는 데이 케어를 방문하였더니, 마침 결원이 있다고 그 자리에서 채용되었다.
그 이유는 1960년에 남쪽에 있는 죠지 피바디 사범대학의 졸업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일주일동안 7일을 근무하게 되었다. 주 5일은 미국 데이케어에서 일하고, 주말은 뉴욕한국교회에서 한글반을 맡았었다. 그러다가 1973년에 뉴욕한국학교를 신설하면서 모든 정열을 학교 경영에 쏟으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이 시절에 한 일 중에는 전국 한국학교의 연구 단체를 만드는 데 미력을 보탠 일도 있다.
복 중의 복은 인복인 것같다. 항상 도와주시는 분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던 일에 감사한다. 이런 분들 덕택에 미국에서 50년의 교육생활이 가능하였음을 잊지 않고 있다.
나의 한국과 미국의 70년 동안의 교육생활은 어린이들이나 대학생을 가르쳤다기 보다는 그들에게 삶을 배우며 즐긴 생활이었다.
서두에 백악관에 갔던 학생은 1978~1980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쳤을 때 중급반에서 공부한 학생이다. 일본에서 온 학생으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 당시 어느 날 우연히 커피샵에서 만났을 때 그의 회사가 시카고에서 개점할 때 입을 옷을 사러 가야 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서너 차례 한국에 갔을 때 그의 백화점이나 호텔에 들렀지만 따로 그를 만난 일은 없다. 바로 그 학생이 미국에서 새로 시작하는 사업에 관한 것을 미국 대통령과 함께 의논하는 자리인 것이다. 그의 성장이 대견스럽다.
얼마 전에는 한국 뉴스에서 한국대신문의 간부들이 움직이고 있는 중에, 60년 전의 우리 반 학생을 만났다. 그의 장난꾸러기 눈은 그대로였다. 그는 장난 대신에 지금은 새로운 사업을 창출하는데 힘을 쓸 줄 안다. 장한 일꾼들이다.
내 ‘옛 필름상자’ 속에서 반세기도 넘은 그 때의 어린이들이 각자의 업적을 소리 높혀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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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전 한국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