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59) 제38대 Gerald R. Ford 대통령③

2019-06-03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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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결과 FDR 에서 Nixon 에 이르는 6대 대통령들 밑에서 FBI 가 불법적으로 수천명의 시민들의 전화를 도청하고 우편물을 읽어보고 건물에 불법잠입하고 사무실과 집에 도청장치를 해왔었고 정보 file 을 작성하는등의 월권을 해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FBI 는 하찮은 “사회주의 노동자당” 사무실을 1960년에서 66년 사이에90번이나 잠입하였었고 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전화가 도청되고 녹음되어 왔던것도 밝혀졌다. CIA 도 미국민 들을 비밀수사하고 우편물들을 열람했던 것이 밝혀졌고 심리변경을 초래하는 위험한 약품 까지도 썼다는 것이 들어났다.

CIA 는Chile 의 Marxist 정권을 붕괴시키는 공작을 한후에 그런 일이 없었다고 국회에 위증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적대적 국가들의 정부요인을 암살 하려는 음모까지 있었다는 것이 들어났었다. Ford 는 민간인 세명으로 구성된 정보감독 위원회를 임명하여 CIA 의 활동을 감독하도록 하였고 상하 양원에서도 정보와 수사활동 등을 감독하는 위원회들을 신설하였었다. 신임 FBI 청장은 FBI 의 활동과 요원들을 엄격하게 통제하겠다고 약속하였었다. 국회는 두 기관들을 새롭게 통제할수있는 법률들을 입법하였다.
정부활동의 공개와 단속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다른 중요한 제도의 개선들도 이루워졌다.


국회에서는 정부의 모든 분야가 공개되어서 국민들이 정부가 무엇을 하고있는지와 불법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지를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미 1966년에 입법 되었으나 잘 활용이 되어오고 있지 않았던 “Freedom of Information Act” 를 1974년과 1976년에 개정하고 강화하여서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문서들의 사본을 누구든지 요청하는 사람에게 주도록 하였다.

다만 국방, 외교, 범죄수사 등의 문서들은 제외 되었었다. 1974년에 Privacy Act 가 입법되어서 자기에 대해서 정부가 수집한 정보를 개인이 읽어볼 권리와 잘못된 정보를 수정할것을 요구할 권리를 주었다. 이러한 법률들 때문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공개적인 정부가 되었지만 국민들과 언론의 요청들에 응답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가지 않을가 우려하게도 되었었다고 한다.

Watergate 사건 청문회중에 Nixon 재선운동에 많은 액수의 불법적인 헌금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헌금 액수도 제한하고 헌금을 제한하기 위해서 Federal Election Campaign Funding Reform Act 가 1974년에 입법되어서 헌금 단속과 함께 대통령후보들 에게 공천선거와 본선거운동 비용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Watergate사건이 조사되고 대통령의 탄핵이 추진되고 있는동안 Nixon 은 국정을 제대로 치리할수가 없었었고 inflation 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여 1973년에8.5% 에 이르렀 다가 1974년에는 12% 로 치솟았고 불경기가 시작되었었다. 물가는 올라가고 화폐가치는 떨어지면서 국민 모두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었다.

Ford 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제일 급선무가 inflation 을 잡고 경기를 회복시키는 일이 라고 생각하였다. 정부 재정지출의 지속적인 팽창으로 시장에 막대한 자금이 쏟아져 들어와서 모든 물가가 올라갔던 것이었다. 그는 정부의 지출 수십억불을 줄여보고자 노력하였 었다. 그는 예산의 축소를 위해서 66번이나 beto 권을 발동하였으나 국회는 계속해서 규모가 커진 예산을 통과 시켰었었다. Inflation 이 생기는 이유는 증대된 정부지출에만 있는것은 아니었다. 실은 유류의 부족에도 큰 이유가 있었었다.

1953년까지 미국은 석유의 생산량이 국내소비를 훨씬 윗돌아서 계속해서 석유와 석유 제품들을 수출해 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규모가 점점 커지고 거의 모든 작업 에서 기계들을 쓰기 시작하자 곧 국내공급이 국내소비를 충당하지 못하도록 되었다. 집과 자동차, 농장과, 공장, 사무실에 쓰이는 석유와 기타의 석유 부산물들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차츰 석유 수입량이 크게 늘어 날수밖에 없었다.

1973년에 Yom Kippur War 가 일어나자 Nixon 은 즉각적으로 Israel 에게 엄청난 군수원조를 하여서 Israel 을 구원해 주기는 하였지만 Arab 의 산유국들은 미국을 원수 국가로 확신하게 되었었다. Arab 국가들은 미국에 석유수출을 중단하여서 미국은 17% 정도의 공급 부족양이 생겼다. 1973/74년 겨울에 미국은 사상 처음으로 휘발유의 부족으로 자동차들이 주유소들에서 장사진을 치는 소동이 일어났었다.

Arab boycott 는 1974년 봄에 중단 되었으나 미국의 유류부족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었다. 산유국들은 1960년에 Venezuela 의 선두로 OPEC (Orga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을 설립 하였었는데 1974년에 이르러서는 산유량과 석유가격을 통제하는 강력한 기구가 되어 있었다. 미국의 석유수요는 계속 늘어나는데 OPEC 은 계속 석유가격을 올리고 있었었다.


이 “국난”을 해결할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었다. 미국의 석유소비량을 줄이고 미국의 석유생산양을 증대하고 석유대체 연료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Nixon 은 우선 유류소비량을 당장 줄이기 위하여 석유류에 대한 세금을 올렸다. 자동차의 주행속도를 내리면 mile 당 연료 소비량이 줄어 든다는것을 알고 시속제한을 55 MPH 로 내릴것을 각주에 명령하였고 이때 거의 대부분의 주들이 시속제한을 55 MPH 로 내렸었다. Nixon 은 장기적인 정책으로 원자력 발전소의 증대, 석탄사용의 증대,
Alaska에 송유관의 건설등을 촉진하였었다. 원자력 발전소의 증설은 원자력 발전소의 사고로 인한 방사선오염의 위험성이 커지는 일이었고 쓰고 남는 핵연료를 안전하게 폐기 해야만 하는 새로운 문제가 생기는 일이었고 석탄사용의 증대는 즉각적으로 공기오염 을 초래하고 국민건강에 해로운 일이었다. Alaska 든지 어디이던지 간에 송유관의 무분별한 건설은 엄청난 자연환경 파괴와 생태계에 악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Ford 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을 즈음에는 최악의 유류난은 지나 갔었기는 하였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상태이 었었다. 1975년에 이르러서는 유류난이 주요 원인이 되어서 미국은 1930년대의 대공황이후 최악의 경기불황으로 빠저 들어가고 있었다. Ford 는 경기회복을 위해서 긴급한 재정정책을 써야만 했었다. 그는 세금을 인하하고 5백억불이 넘는 재정적자를 내며 지출을 증대하였다. 다행히 Ford 의 정책은 경기를 재활 시켰었고 1976년에는 inflation 이 5% 이하로 내려갔었다.

Ford 는 최근대 사상 처음으로 미국이 국제분쟁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점, 경제를재활 시키고 inflation 을 중지 시킨점, 정치와 분열 되었던 국론을 상당히 화해시키고 여러가지 제도를 개선시킨점등 자신의 “업적”이 상당히 있었다고 생각해서 이제는 자기의 실력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보고 싶어져서 1975년 7월에 1976년 총선에 출마할것을 발표하였다.

그의 경쟁자는 원래 영화배우 이었다가 California 주지사를 두번 지낸 Ronald Reagan 이 었는데 그는 아주 설득력이 있는 연설가로써 철저한 반공주의자이 었으며 공화당 보수주의 계의 지지를 받은 사람이 었었다.

Reagan 은 쏘련과의 detente 에 반대하였으며 감세, 정부활동의 축소, 소극적인 사회복지 정책 등등을 지지하는 전형적인 공화당의 보수주의자 이었었다. Ford 는 공화당이 더 온건한 정책을 채택해야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수 있다고 주장하였었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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