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57)제38대 Gerald R. Ford 대통령①

2019-05-13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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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ald R. Ford 가 Nebraska 주 Omaha 에서 1913년에 Leslie Lynch King, Jr. 로 출생 하여 돐이 막 지난후 오랫동안 불화해왔던 부모는 별거를 시작하였다가 결국 이혼 하였고 그가 두살때에 모친은 그를 데리고 친정 부모가 있는 Michigan 주의 Grand Rapids 로 이주하였다. 그의 부친은 은행가의 아들로써 Wool Trader 이었었는데 이혼후 Ford 를 돌보아 주지 않았었었다고 하며 그의 조부가 Ford 가 17세때에 사망할때까지 그를 도왔었다고 한다. 부모 이혼후 Ford 는 생부와 별로 접촉이 없었으며 세명의 이복동생들도 그가 17세가 되어서야 처음 만났었다고 한다.

자기 집안소유의 piant 사업의 salesman과 Ford 가 세 살때 재혼한 모친은 세동생들을 낳았으며 계부는 Ford 를 잘 보살펴 주었고 입양을 하면서 자기 이름인 Gerald R. Ford 라는 이름을 그가 쓰도록 하였다고 한다. Ford 는 두뇌가 명석하였던 모양으로 미국 전국 ”곱셈하기” Champion 을 하였었고 Boy Scout 에도 열중 했었는데 미국 대통령중 유일하게 Scout 중의 최고등급인 Eagle Scout 를 지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기억력이 아주 좋았던지 한번 만난 사람들의 얼굴, 이름, 직업 등과 기타의 정보들도 다 기억하여서 많은 사람들과 쉽게 친구가 되었었다.

공립고등학교에서 football captain 을 하고 University of Michigan 에 입학한 Ford 는 기숙사에서 접씨딱기로 학비도 충당하였 었는데 건장한 체구에다가 운동에 큰 소질이 있어서 곧 U.M. 의 football 선수가 되었다. 추후 그는 선수들간에 가장 중요한 선수로 뽑혔으며 U.M. team 이 패전할 때에도 기둥처럼 잘 버티었었다고 한다. Ford 는 football 에서 겪었던 경험들이 추후 오랫동안 몸담았던 정치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술회했었다고 한다. 그가 Center, Line Back 등 가장 우수한 football 선수로 활약할때 썼던 “48번”은 그를 기념하여 1994년부터 20여년동안 U.M. 에서 쓰지 않았을 정도의 중요한 선수이었었다고 한다. 그가 대통령이 된후에 가끔 대통령가인 “Hail to the Chief” 대신에 U.M. 의 응원가인 “The Victors” 를 불러달라고 했을 정도로 그는 U.M. 과 football 에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U.M. 을 방문하면 Football 선수들을 만나보고 같이 hurdle (시합전 선수들 끼리 원형으로 모여서 허리를굽힌채로 머리를 조아리며 구호를 외치는 작전모임) 도 하였었다고 한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Georgia Tech 이 만일 U.M. 이 흑인선수 Willis Ward 를 참가 시키면 U.M. 과 Football 대전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학생들, 선수들, 졸업생등이 모두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U.M. 은 부득이 Ward 를 제외시키기로 하였었다고 한다. 출장경기시에 항상 Ward 와 roommate 를 해오던 Ford 는 이때 4학년이었는데 자기도 참가하지 않겠다고 U.M.에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Ward 의 간곡한 권고를 받아 드려서 결국은 참가하였었다고 한다. 후일 정치인으로서는 항상 온건파이었으나 보수적 이었던 Ford 의 인간적인 본성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과분한 Social Welfare 등을 반대한 공화당원이 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주도의 민권법안들의 통과에 협조하였었다.
U.M. 졸업후 Ford 는 pro football team 인 Detroit Lions 와 Green Bay Packers 등으로 부터 prof 선수로 입단할것을 초청받았으나 사양하고 Yale 대학교의 Football 부코치와 Boxing Coach 로 취직했다.

그는 Yale 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신청을 하였으나 교직원인 Coach 라는 이유로 입학을 허락하지 않아서 U.M. 의 법과대학을 1년 다닌후에 Yale 대학 법과대학에 와서 상위 25% 안에 드는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고향에 돌아와서 친구와 함께 변호사로 1년간 동업하다가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하자 1942년 4월에 해군소위로 임관되어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서 기초조종술교관, Football Coach 등으로도 일하다가 항공모함을 타고 남태평양 해역에서 참전했다가 무공훈장도 몇개 받은후 1946년에 해군소령으로 제대 하였다. 고향에 돌아와서 변호사를 하다가 1948년 총선에서 당선되어 Grand Rapids 의 공화당 연방하원으로 정치생활을 시작했다.

총각이었던 Ford 는 1948년에 이혼녀인 Elizabeth Bloomer 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녀는 New York 에서 Model 도 하였었고 “Martha Graham of Grand Rapids”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춤을 잘 추었었다고 한다. 말도 조금 어눌해 보이고 사교에도 서툴러 보였던 Ford 와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활달한 여성이 었으며 Ford 의좋은 반려자이 었었다고 한다. 입이 과묵하고 감정의 표현을 잘 하지 않았었던 직전의 First Lady Patricia Nixon 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Betty Ford 는 백아관이 국민들에게 더 공개되도록 하였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유방절제수술에 대해서 스스럼없이 얘기해서 미국 여성들이 유방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도록 하였으며 자기의 음주습관, 정신과 치료경험등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얘기 하였었다고 한다. 1975년 8월에는 CBS 의 “60 Minutes” 라는 좌담 program 에서 임신중절, 혼전성교, 여성의 권리 등등 당시 사회적으로 예민했던 문제들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게 대담을 하여서 보수측 사람들로 부터는 비난도 받았으나 대부분의 미국사람 들은 이제 백악관이 꾸밈없는 정상적인 곳이 되었다고 칭찬했었다고 한다.

미국 부호들의 mansion 들을 관광해보신 독자들은 욕실까지 붙어있는 남편용, 부인용 침실들이 중간에 넓은 복도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것을 보고 그때 당시의 미국의 관습에 대해서 의아해 하셨으리라고 생각된다. 백악관도 부부침실이 멀리 떨어져 있던 구조이었던 모양으로 대통령부부는 멀리 떨어져서 잠들을 잤었는데 제30대 Calvin Coolidge 대통령 (1923-29) 의 부인 Grace Coolidge 만이 이 불문률을 감히 깨트렸었던 이후 Betty Ford 가 두번째로 남편과 같은 침실에서, 더구나 Double Bed 를 쓴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었다고 한다. “남이사! 미국사람들은 참 할일도 없는 사람들이로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월남전쟁중에 많은 공화당원들처럼 “매”파이었던 Ford 가 Lyndon Johnson 대통령의 월남전략을 승전을 할수없는 우유부단한 것이라고 계속 비난을 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LBJ 는 “The trouble with Jerry Ford is that he used played football without helmet” 이라고 비꼬았으며 Ford 가 하원 원내총무를 하면서 LBJ 의 The Great Society 같은 정책을 위한 입법에 잘 협조를 하지 않자 LBJ 는 “Jerry Ford is so dumb that he can not fart and chew gum at the same time” 이라고 독설도 퍼부었었다고 한다.

그러나 LBJ 는 Ford 가 성실한 사람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신임을 받고 있는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Kennedy 대통령의 암살사건을 조사한 Warren Commission 의 위원으로 임명하였었다. Ford 는 말솜씨가 신통치 않았었고 정치적인 전략을 설명할 때에도 Football game 의 예를 많이 들어서 설명했던 까닭에 애당초 “학술적”인 사람은 아닌것처럼 보였었다고 한다. 오랜 의원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탁월한 입법활동은 없었던 Ford 는 항상 꾸준하고 성실한 성격에다가 대인관계가 온화했었던 덕택에 하원의원을 25년이나 하는 동안에 적이 없었었다고 하며 마지막 9년여 간에는 하원의 공화당 원내총무로 일했었다.

그는 도중에 주지사나 상원의원으로 출마할것을 여러번 권유 받았으나 사양하고 하원의장이 되어보기를 원했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되어보고자 했던 야욕도 없었지만 자신의 실력으로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수는 없는 인물이었었다. 긴박한 정국속에서 Agnew 부통령이 뇌물수수사건으로 사퇴하자 국회의 동의를 분명히 받아낼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Ford 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그는 Nixon 의 부통령 지명을 받았었다고 말할수도 있을 것이다.

Ford 는상원에서 92대3 으로, 하원에서는 387대 35 으로 헌법개정25조항에 따라 선거로 뽑히지 않은 최초의 미국 부통령이 되었었고 곧 이어서 선거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 까지 되었었다. 그는 “국민으로부터 임무를 직접 위임 받지 않은 대통령”으로써 더 무거운 사명감을 느낍니다.” 국민 여러분들께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겸허하게 말하면서 최단명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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