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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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46) 제37대 Richard M. Nixon 대통령④

2019-02-18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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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월남에서Nixon 대통령이 절대로 용납할수 없다고 말했던 일을 단행한 것이다. Nixon 은 “미국의 일방적인 철수는 있을수 없으며 ‘패배’ 라고 공인될수 밖에 없는 조건을 받아드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얘기했었던 것이다. 월남전에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던 1965년에는 2만여명의 북월남군이 월남에 있었으나 미군이 완전 철수한 후에 월남에는 14만5천명의 북월남군이 남아 있었다.

월남전쟁의 “전쟁비용” 을 통계숫자를 써서 계산해 보기로 하자. 미국은 직접/간접, 은밀/공개적으로 1954년부터 1975년까지 20여년간이나 월남전쟁에 관여해오고 있었다.
월남전쟁 기간동안에 군복무를한 미 군인 총연수는 연876만명이 었으며 그중 연2백만 여명이 월남전에 직접 참전 하였었다고 한다. 전사자는 47,244명이었고 병원에서 치료받은 중상자는 15만3천명이었고 경상자는 15만명이었으며 행방불명자가 2,483명이 었다고 한다.

공군과 해군의 비행기들은 52만7천여회 출격을 하면서 616만톤 이상의 폭탄을
조그마한 월남땅에 쏟아부었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중에 미국이 투하한 폭탄의 3배에 이르는 것이었다고 한다.


월남의 전쟁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었다. 월남에서는30만명, 북월남에서는 6만5천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산 된다고 한다. 월남군에는 22만4천명의 전사자와 57만1천명의 전상자가 있었다고 하며 북월남군에는 66만명의 전사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산되었으며 전상자는 몇백만명이 었을지 알수 없었다고 했다.

Cambodia 와 Laos 의 전투들에 들어간 전비들을 제외하고서도 월남전에 쏟아넣은 직접전쟁 비용이 1,060억불이나 되었었다고 한다. 미국이 완전히 철수한 1975년후에 150만여명의 난민들이 소형선박을 타고 떠나서 boat people 들이 되었으며 미국은 1978년 부터 이들에게 이민을 허가하여 1990년 인구조사에 약 90만명의 Indochina 사람들이 미국시민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결국 월남전쟁은 미국역사상 두번째로 길고 (첫번째는 현재 진행중인 Afghanistan 젼쟁) 가장 전쟁비용이 많이 들어가고 가장 “중요한” 전쟁이 되었었다.

아마도 미국이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미군이 동남 아세아에서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을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엄청난 수업료를 낸 뼈아픈 교훈이란 말이 더 맞을것 같은데 미국이 앞으로 비슷한 역사의 반복을 피할수 있을 것인지는 두고 봐야할 일이다.

월남의 근대약사

필자는 미국이 무슨이유로 월남전에 애당초 “참전했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미국 사람들의 판단이 지금까지 엇갈리고 있다는 언급을 하였었다. 월남전에 대한 “미국역사” 를 읽어보신 후에도 독자들께서는 여전히 혼동 되시리라고 생각된다. 어떤 역사가들은 미국이 애초에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참전을 하였다가 7대에 걸친 대통령들의 지속적인 오판으로 미국이 월남이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것 이라고 말한다. 월남전쟁이라는 수렁텅이 속에 빠져들어가 만신창이가 되었던 미국의 “실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월남의 억울하고도 슬픈 근대약사를 간단하게라도 살펴보는것이 독자들의 “판단”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의 국운이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등의 외세에 의해서, 그들의 국익들을 위해서 결판이 났던것 처럼 후일 French Indochina 라고 불리우는 식민지 의 일부지역이 되는 월남제국은 천덕구리로서 “존속”해 오다가 세계 제2차대전의 종식과 함께 “독립”을 하게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17세기초부터 불교국가이던 월남에 천주교 신부들이 선교를 위해 들어온후 무역선들이 뒤딸아 들락거리다가 천주교 교단과 교인들을 보호 한다는 명목으로 불란서 해군이 전쟁을 시작하였고 1887년에 월남, Siam (태국) 의 일부, Cambodia, Laos, 중국땅의 일부가 포함된 French Indochina 가 건립되면서 불란서의 앞잽이가된 월남황제의 명목상의 통치아래 불란서의 식민지가 되었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불란서의 식민지로 연명해 오던 월남은 제2차 세계대전중 1941년에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였고 황제는 홍콩으로 도망쳐가고 불란서도 쫓겨 나갔었다.

2차대전중 동남아 사정을 전혀 모르던 미국의 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이 장개석에게 종전후에 중국이 월남을 가질것을 제안하였으나 장개석은 Indochinese 는 Chinese 가 아니며 전혀 다른 나라라고 말하면서 인수할것을 거절 하였었다고 한다. 후일 미국의 CIA 의 일부로 흡수되는 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는 일본군을 월남에서 철퇴시키기 위하여 공산계열의 독립투사 호지명이 게릴라군을 창건하도록 많은 군수물자를 적극후원 하여서 일본군과 싸우게 하였는데 일본군은 2차대전 패전과 함께 철수하였고 호지명은 일본군 철수후 3주일만에 월남정부를 수립하고 불란서의 앞잽이 Bao Dai 를 추방하였다.


그러나 불란서가 다시 식민지를 되찾기 위해서 돌아와서는 미국의 묵인아래 1946년 12월에 Bao Dai 황제를 불러 드려와서 허수아비 정부를 세우고 호지명은 다시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서 이번에는 불란서와 게릴라전을 시작하였다. 1950년 2월에 불란서는 월남, Cambodia, Laos 3국에게 명목상의 독립을 허락해주고 불란서 연방안에서 활동하도록 하였다. 미국은 불란서의 조치에 합의하였고 쏘련과 중공은 호지명정부를 국가로 인정 하면서 원조를 하기 시작하였다. 호지명에게 계속 패전해오던 불란서는 미국에 군사원조 를 요청하였다. 마침 대쏘련 냉전중에 있었던 미국은 서방국가들의 결속을 위하여 불란서의 협조가 필요하던때 이어서 불란서의 요청을 거절하기가 힘들었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년부터 본격적으로 불란서를 원조하기 시작하다가 1952년에는 총전쟁비용중 40%, 1953, 54년에는 80% 를 부담 하였었다.

그러나 1954년 5월에 불란서가 최강의 난공요새로 생각했던 Dien Bien Phu 가 호지명 에게 포위되어 패전할 위기에 처해서 미국에게 호지명군을 폭격해 줄것을 요청하였으나 Eisenhower 가 미국이 식민국을 도웁는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폭격을 거절하자 불란서는 항복하게 되었었다.

1954년 7월에 Geneva 에서 맺은 협정으로 위도 17도선 남쪽은 미국과 불란서의 지지를 받는 월남정부가, 17도선 이북에는 중공과 쏘련의 지지를 받는 호지명의 북월남 정부가 세워지도록 되었고 1956년에 총선거를 통해서 통일 월남정부가 수립되도록 결정 되었었다.

남월남에서 Bao Dai 황제 밑에서 수상을 하던 Ngo Dinh Diem 은 혁명으로 Bao Dai 를 살해하고 대통령이 되었는데 1956년에 이르러서는 만일 선거가 실시되었다면 호지명이 승리하도록 되어있었다. Ngo 대통령은 총선참여를 거부하였고 그에 반발하여 남월남에는 월공 (Viet Cong) 이 1957년에 조직되어 Ngo 대통령은 호지명과 Viet Cong 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극도로 부패하고 잔인한 독재자가 되었었다. 이 폭정에 항의하여 불교승려들이 분신자살들을 하였었고 전국에서 연일 항의시위가 일어나서 Ngo 정부는 붕괴직전까지 이르렀다가 미국 CIA 의 후원아래 일어난 군사쿠테타로 Ngo 대통령이 살해되고 군부정부가 수립 되었다가 결국 남월남은 멸망하게 되었었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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