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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미주한인사회 50년 (3) 경제<1970년~2009년> 지진·폭동의 상처 이겨내며 눈부신 영토 확장

2019-01-01 (화) 남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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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100개 안된 한인업소 80년대 말엔 2만여개로

▶ 은행 설립·국적기 취항·FTA 등 성장의 밑거름 돼

[신년특집] 미주한인사회 50년 (3) 경제<1970년~2009년> 지진·폭동의 상처 이겨내며 눈부신 영토 확장

한인 경제는 지난 반세기동안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왔다. LA 한인 경제 중심지로 우뚝 선 한인타운 윌셔가 전경. <박상혁 기자>

미주 한인경제의 성장은 한인사회의 발전사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 50년간 남가주 한인 사회의 질적·양적 발전의 원동력은 모두 한인 경제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와이에 닻을 내린 계약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을 밑거름으로 성장의 기반을 닦은 한인 경제 발전은‘무에서 유를 창조한 역사’이다. 기적의 열매들은 제조·금융·서비스업 뿐만 아니라 정보통신(IT)에 이르기까지 미국 경제 전 영역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수많은 시행착오에도 좌절하지 않고 성장해 온 한인경제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질곡의 역사 속에서 한인 경제가 나아갈 길을 가늠할 수 있는 단서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50년 전인 1969년 첫 신문을 발행한 미주 한국일보 창간 50주년을 맞아 한인 경제가 걸어온 반세기를 되돌아보며 다음 반세기를 상상해본다.

1970~1979년: 이민과 함께, 한인 경제 태동기

1970년대는 한국인의 이민 물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다. 세칭 ‘케네디 법안’이 발효된 1968년을 계기로 이민자 수가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1970년 1만명에 불과했던 남가주 한인 인구는 1979년에는 12만~15만명으로 늘어났다. 본보가 1972년 1월1일자 신년특집 부록으로 발행한 첫 번째 업소록에 18개 업종, 69개에 불과했던 한인업소는 10년이 채 못돼 올림픽과 8가에만 300여개로 늘어났다.


한인 사회 급성장의 결정적 요인은 LA 한국일보 창간과 대한항공의 여객기 미주 취항이다. 한국 외환은행이 1967년 7월 LA 다운타운 지역에 LA지점을 개점할 수 있게 됐다. 외환은행은 1974 년9월 현지법인인 ‘가주외환은행’이 남가주 최초의 한인 은행으로 문을 열어, 주류 은행의 높은 문턱과 언어 문제로 고심하던 한인들이 한국어로 은행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당시 한인 사회의 주요 업종으로는 가발 수입업이 호황을 누렸다. 한국이 1969년 미국에 수출한 한국산 가발은 1억3,000만달러에 달했다.

1969년과 1970년대 초반 몇몇 안 되는 한인 상점은 현 LA 한인타운보다 남쪽인 제퍼슨 블러버드에 많았다. 당시 가장 오래된 식당인 고려정(대표 헨리 류)과 70년대 한인회장을 지낸 김기성씨가 경영한 동양식품점 등이 제퍼슨에 위치하고 있었다. 식당은 왕관식당, 한국식당, 미네스, 뉴페킹, 한일관 등 네댓 개가 전부였고 식품점도 전 미주 동양인을 상대로 두부와 단무지 등을 공급한 대동실업과 개업 후 곧 문을 닫은 한국식품점 등 세 곳뿐이었다.

부동산업에 소니아 석 여사와 조지 최씨, 보험업에 추부원, 영 김, 벤 서씨 등이 초기 한국일보의 낯익은 광고주들이었으며 한인 의사로는 서종원씨와 김창하씨가 개업 중이었다. 한미여행사와 나성여행사, 문성옥씨의 한국 특산품상, 장희준씨의 장스 그라지 등과 함께 하이소사이어티 양복점(대표 임윤영)과 박상협씨가 운영하는 보석상이 있었다.

1972년 4월19일 태극마크가 선명한 대한항공 B707 제트기가 도쿄, 호놀룰루를 거쳐 LA 국제공항에 도착하면서 국적기의 LA 취항이라는 한인 이민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현재의 LA 한인타운이 형성되면서 60년대 황금기를 누렸던 가발업이 점점 퇴조하기 시작했고 대신 리커·마켓·햄버거샵 등 ‘먹는장사’가 한인들의 주 업종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당시 1만~2만달러의 적은 밑천에 노동력을 집중, 몸으로 때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년특집] 미주한인사회 50년 (3) 경제<1970년~2009년> 지진·폭동의 상처 이겨내며 눈부신 영토 확장

한국일보가 창간한 1969년 오픈한‘올림픽 마켓’. 구멍가게 수준에서 조금 더 큰 규모의 식품점으로 발전했다.


1980~1989년: 멈춤 없는 성장기

LA 한인사회, 나아가 한인 경제에 1980년대는 한마디로 ‘멈춤 없는 성장’의 시기였다.
한인사회의 인구와 상권도 확장에 확장을 거듭했다. 80년대 말 남가주 한인 인구는 40만으로 통칭되었고 업소 수는 2만을 넘어섰다.


동서남북으로 한없이 뻗어가는 코리아타운, 자고 일어나면 부쩍 늘어나는 한인 인구, 남가주 어느 구석에도 자리 잡고 있는 한인 업소 등 한인 사회의 팽창은 눈이 부셨다.
한인 상권도 LA에서 교외지역으로 확산, 오렌지카운티 한인업소들이 80년 250개로 늘어나면서 가든그로브가 LA 한인타운에 이은 제2의 한인 거주 및 상권으로 자리를 굳혔다.

80년대는 미주 한인들이 주축이 된 한인들을 위주로 한 로컬은행이 태동한 시기였다. 순수한 한인자본을 가진 은행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기존 은행이 아닌 설립을 통한 첫 은행은 한미은행이 1982년 12월 올림픽에 지점을 열면서 남가주에서 역사적인 로컬 한인 은행 1위의 깃발을 올렸다. 한미은행은 일반 주주 100명이 309만달러, 이사 8명이 235만달러 등 544만달러 자본금으로 출범, 미국에서 한인 이민자들이 출자해 설립한 최초의 은행이 됐다. 이에 앞서 1980년 12월 출범한 윌셔은행의 경우 미국인 이사 11명과 한인 이사 4명이 400만달러 자본금을 모아 출범했다.

1986년 3월에는 자본금 400만달러로 중앙은행이, 현 나라은행은 1989년 6월 자본금 400만달러가 모아져 ‘미주은행’으로 출범하는 등 4개의 한인은행이 생겨났다.

한국 기업 제품의 미국 진출도 80년대 들어 본격적인 물꼬를 텄다. 현대자동차가 1986년 미국시장에 ‘엑셀’ 모델을 필두로 진출하면서 미주 한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한국 기업들의 해외투자도 활발해지면서 대한항공이 LA 다운타운 힐튼호텔(현 인터콘티넨탈호텔)의 1억6,800만달러 매입을 발표했는데 이는 당시까지 한국 기업이 해외에서 구입한 부동산 중 최대 규모였다.

1990~1999년: 시련을 통한 전환기

90년대는 LA, 나아가 남가주 한인사회 최대의 시련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또 그 시련에 맞서 저력을 키우고 탈바꿈하며 제2의 도약을 위한 발판을 다진 전환기이기도 했다.

90년대의 한인사회는 92년 4.29폭동과 94년 1월17일 노스리지 지진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특히 4.29폭동은 지난 30년 한인 이민사에 최악의 재난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사실 1992년 4.29 폭동 이전부터 한인경제는 이미 위험신호를 보이고 있었다. 80년대 후반 과열현상을 빚은 한인타운의 부동산 거품 경기는 미국경제의 불황이 확연한 90년대에도 식지 않았었다. 이처럼 추세파악에 실패한 부동산 거품경기가 서서히 스며드는 주류의 불황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그 여파를 드러낼 즈음 한인사회를 강타한 것이 4·29 폭동이었다.

4.29 폭동은 한인 이민사에 전대미문의 재앙이었다. 사망 1명, 부상 46명, 방화·약탈 2,200여곳, 재산피해 3억5,000만달러라는 가시적 피해와 함께 한인사회는 측량하기 힘든 정신적 아픔을 아직도 겪고 있다.

1991년 11월15일에는 대한항공에 이어 제2의 민항사인 ‘색동날개’ 아시아나항공이 LA~서울 노선에 취항했다.

1991년 6월에는 새한은행이 출범, 영업을 시작했다. 새한은행의 출범에는 이사와 일반 투자자 120명이 자본금 540만달러를 출연해 설립했다.

2000~2009년: 가속화된 다변화 시기

2000년대 들어 한인 사회 경제는 다변화의 가속화 속에서 변화를 꾀하게 됐다.
1세 이민자들의 자녀로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성장하면서 영어에 익숙한 1.5세들이 부모들의 사업체를 이어받는 경우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 1.5세들은 또 1세들이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인터넷 사업이나 주류 사회에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미주 한인 사회 경제의 지평을 넓혀 갔다.

한미 무비자 시행과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은 한국과의 경제적, 인적 교류를 증폭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특히 2008년 12월부터 시행되기 시작한 한국인의 미국 무비자 입국은 남가주를 비롯한 미주 한인 사회의 경제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당시 한국인의 연 미국 방문자 수는 100만명을 넘어서 가히 폭발적이라 할만큼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국 경제가 2007년 4분기부터 침체에 돌입하면서 남가주 한인사회도 주택가격 하락, 은행업계 실적 악화, 소매업계 부진, 실업률 증가 등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 한인들의 가장 인기 있는 투자대상이었던 부동산에 대한 한인들의 매입 붐은 더욱 가속화됐다. 당시 김희영 부동산이 한인 비즈니스를 조사한 결과 한인 사업체는 일반 상점이 936개(7억489만달러), 주상복합 355개(2억585만달러), 생산업체 255개(3억3,692만달러), 식당(6,559만달러) 등으로 나타났다.

<남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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