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현대판 연좌제

2018-12-07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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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명연예인의 부모에게 ‘돈을 떼였다’는 폭로가 이어지자 ‘빚투 (# 빚too)’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지난 11월19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래퍼 마이크로닷의 부모가 20년 전 충북 제천에서 주변인들에게 막대한 금전적 손해를 끼치고 뉴질랜드로 잠적했다는 의혹이 시작이다.

연이어 래퍼 도끼의 어머니, 가수 겸 배우 비의 어머니가 돈을 빌려간 뒤 갚지 않았다는 폭로가 이어졌고 배우 차예련, 한고은, 조여정, 아이돌그룹 마마무 멤버인 휘인도 아버지 사기 의혹에 휘말렸다. 이들 대부분은 어렸을 적에 부모가 이혼하여 아버지와 오랜 세월 어떠한 교류나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일이 생기면 대중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연예인들은 참으로 당황스럽지만 무조건 공손하게 대하며 잘 알아보겠다 해야지, 사실무근이다, 법적대응 하겠다 하면 금방 대중의 철퇴가 내려진다. 바로 마이크로닷이 그런 경우로 그는 출연 중인 모든 프로그램에서 자진 하차했다. MBC '나 혼자 산다’ 프로에서 순대, 떡볶이, 김밥, 쫄면 등 분식 먹방으로 잘도 먹고 마시며 에너지 넘치게 살던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못난 부모를 가져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속상한데 오래 전 남남이 된 부모가 벌인 사기극으로 네가 아들이고 딸이니 갚으라고 빚쟁이가 나타난다며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가족이라고 모두 사이가 좋은 것이 아니며 일반적인 상식선이 아닌 부모 자녀관계도 많다.

솔직히, 이 현대판 연좌제가 왜 이리 큰 화제가 되어야 하나 싶다. 이들 사안 대부분이 주장이나 증거가 명확하지 않고 사기나 빚 채무행위에 본인이 관여한 바 없고 계약 당사자가 아니므로 법적 책임은 없다. 부모의 빚까지 상속받지 않은 이상 자녀가 부모의 빚을 갚을 의무는 없고 살아있는 부모 역시 파산하거나 채권 시효가 소멸된 경우라면 갚을 의무가 없다. 그러나 사실인 채무관계가 확인되면 도의적인 책임은 있다고 할 수 있다.

연예인들은 공인이다 보니 이러한 스캔들은 치명적이다. 그렇다고 망신주기부터 시작하여 활동중단이 되면 그 빚은 영원히 받을 수 없다. 소속사를 통해 사실 확인을 거치고 조용히 해결해야 할 일이다.

이 현대판 ‘연좌제 ’는 6.25의 비극을 겪은 한국민들에게 아픈 기억이 있는 단어다. 연좌(連坐)는 죄인의 죄를 가족, 친지들에게도 함께 묻는 제도로 봉건사회의 왕조 국가에서 주로 시행됐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1894년 갑오개혁으로 ‘죄인 이외에 연좌시키는 법은 일절 금지한다’고 규정, 과거의 악법이 폐지되고 근대적 형사사법 제도가 본격 도입됐다. 하지만 6.25 전쟁을 거치면서 군부독재시절, 연좌제는 살아 움직였다.

주위에서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해 잘 다니던 중에 갑자기 퇴학을 당하고 신원조회에 걸려 공직에 나갈 수 없고 취업은 물론 해외여행도 제한되는 등 연좌제의 족쇄 속에 불우한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을 보았을 것이다. 가족 중에 월북자가 있거나 공산당에 협조한 이들은 자손들에게 평생 연좌제의 그늘이 드리워졌던 것이다.

그러다가 1980년 10월27일 개정된 제9호 대한민국 헌법은 제12조 제3항을 통해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고 명시, 연좌제가 폐지되었다. 바로 전두환 대통령 당시다. 세간에 의하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마하고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물론 아직, 신원조회라는 것이 연좌제 성격이 잔존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긴 하다.

사실, 뉴욕한인사회에도 돈을 빌려주고 빌리는 채무관계가 자주 있다. 그런데 같은 교회 교인이거나 학교 동창 사이에 빚을 갚지 못하게 되면 서로 껄끄러운 사이가 된다. 동창회에 둘 다 안 나가게 되고 교회를 옮기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지만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할 수 있겠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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