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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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돌아갈 고향은?

2018-09-28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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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저녁 퀸즈의 메도우 코로나 팍에서 열린 ‘사이먼 앤 가펑클’의 폴 사이먼(1941~ ) 고별 공연을 보았다. 세 시간여 동안 꼬박 무대에 서서 노래하는 전설의 가수는 초청가수 한 명 없이, 빨간 반팔 티셔츠에 검정 재킷을 입고 열정적으로 기타를 치고 몸을 흔들었다. 자그마한 키에 다부진 몸매, 짧은 은발, 변함없는 목소리의 그가 77세라니, 관객들은 노래 한곡이 끝날 때마다 환호했다.

몇 시간 전부터 메도우 코로나 팍 잔디밭에 담요를 깔고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맥주를 마시며 들뜬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던 관객들은 공연 30분 전부터 아예 모두 일어서 있었다.

첫 곡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The Sound of Silence )’ 가 나오자 수천 명의 관중들은 모두 춤을 추었다. 소리를 질러 다른 사람의 음악 감상을 방해 하지도 않고 과격하게 춤을 추느라 다른 사람과 부딪치지도 않았다. 그저 혼자 음악에 몸을 맡긴 채 몸을 조용히 앞뒤로 흔들기도 하고 양팔을 흔들면서, 손뼉을 치면서 흥겨워했다.


내게 가장 좋았던 곡은 역시 ‘브리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Bridge over Troubled Water’ 였다. 이 노래를 열심히 듣고 부르던 젊은 시절이 기억나고 한국에서, 미국에서 열심히 달려왔지 싶어 “그동안 애썼어. ” 하고 자신을 위로도 해주고 싶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무대 오른쪽으로 1964년 세계박람회가 열렸던 뉴욕스테이트 파빌리온 높은 벽에 하얀 네온 조명 ‘ WELCOME HOME' 이 공연내내 눈에 띄었다.

폴 사이먼은 어려서 이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았고 학교를 다녔고 1950년대부터 아트 앤 가펑클과 공연활동을 시작했다. 따로, 또 같이 노래하며 60여년 가수 생활을 마친 뒤 고향 퀸즈에서 컴백 홈 공연을 하는 가수, 부러웠다. 감히 천부적 음악적 재능도 명예도 재산도 아니라 그에게는 돌아올 고향이 있음이었다.

그는 다 늙어 고향 사람들 앞에서 ‘ 지난 세월 나는 이렇게 살아왔어요, 참 열심히 살았지요, 그리웠어요’ 하고 노래로 인생 고백을 하고 있었다.

우리 이민 1세들은 어디로 돌아갈까? 과연 돌아갈 고향은 있는 것일까? 한국에, 뉴욕의 플러싱, 베이사이드 등 여러 지역에 고향이 있지만 내가 가장 돌아가고 싶은 고향은 엄마, 아버지가 우리 6남매가 함께 살던 부산 부전동 집이다.

수돗가에서 눈만 내놓고 새하얀 비누칠을 한 엄마는 마당에서 노는 나를 돌아보고 “어헝” 하고 놀렸고 난 깜짝 놀라면서 좋아라 웃었다. 아버지는 잔칫집에 다녀오면 양주머니 가득 사탕을 넣어 갖고 와서 내 이름을 불렀다.

저녁 시간이면 살아있는 장어가 가득 담긴 커다란 고무대야를 머리에 인 아주머니가 “꼼장어 사려” 하고 골목을 외치고 다녔다. 엄마가 장어 장수를 불러 몇 마리를 주문하면 그 자리에서 꿈틀거리는 장어를 꼭 잡고 순식간에 껍데기를 벗겼다. 토막으로 잘라 초고추장과 함께 주면 맛있는지, 징그러운지도 몰랐다. 그저 언니오빠가 달려들어 먹으니 어린 나도 질세라 같이 먹었다. 그러다가 입을 밥에 문 채 뒤로 꽈당 넘어져 잠이 들곤 했다.


작년 여름 10년 만에 한국에 가면서 그 집을 가고 싶었다. 언니오빠들과 묻고 물어서 찾아갔더니 그 집은 주차장이 되어있었다.

“이 전봇대는 그대로다. 우리집 대문 옆에 있었다. ” 남동생이 집터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전봇대를 발견하며 신기해했다. 복잡한 거리와 고층 아파트 숲으로 변해버린 부산 시내는 더 이상 내 고향이 아니었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한국전쟁 중 이북의 고향을 떠난 이, 댐 건설로 고향이 물에 잠겨버린 이, 일찌감치 유학을 떠나 못살던 고향만 기억하는 이 등 돌아갈 고향이 없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고향은 플러싱이고 롱아일랜드이고 팰팍 일 것이다. 그 안에 우리들은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로 자리할 것이다. 우리에게, 후손들에게 고향을 만들 기회가 있는 것이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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