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꽃을 사는 마음으로

2018-09-28 (금) 최동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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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을 두고 비가 내렸다. 여름의 떠남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빗줄기는 밤새 빈 벽을 타고 흘러 내리며 처연한 소리를 내었다. 이제 이 밤이 지나면 방문 앞까지 성큼 다가선 가을의 창백한 기운과 마주할 것이었다. 하루 해를 떠안기도 버거웠던 시간에 쉼표 하나쯤은 찍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가벼운 외투를 꺼내 입고 아내와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오늘은 그동안 출퇴근 하는 차 안에서 눈으로 이미 익혀둔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걸어 볼 참이었다.

트레일은 작은 마을을 가로 지르는 낡은 철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그 기능을 잃었지만 흉물스럽지 않게 공원의 일부가 되어 있었고, 강을 건너는 녹슨 철교는 구시가지와도 멋스럽게 어울렸다. 버팀목 사이에 간신히 뿌리를 내린 들꽃, 시간이 정지된 듯한 오래된 상점들과 그 사이에 있는 좁은 도로, 또 그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낡은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탓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느낌마져 들게 하는 곳이었다.


일기예보에서 들은대로, 맑다고는 할 수 없는 하늘을 보며 천천히 걸었다. 흐린 하늘 탓에 멀리 보이지는 않았으나 수채화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하늘보다 구름을 쫒아 가는 바람이라도 있는 날이어서 걷기에는 더 없이 좋았다. 흐린 하늘 아래에서는 내 앞에 펼쳐진 사소한 것들 모두가 온전히 나를 위해 존재 하는 것 처럼 느껴지는 것도 기분 좋았다.

철로 아래를 끼고 돌면 그 끝으로 강이 흘렀다. 강 바닥이 말갛게 들여다 보이는 강 한가운데까지 들어가 낚시대를 드리운 한 청년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시간이 멈춘듯한 고요 속에서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이 단순히 월척만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동안 만이라도 내 상념 따위는 물고기처럼 헤엄쳐 가게 두기로 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북쪽 하늘의 찢어진 먹구름 사이로 보이던 파란 하늘이 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발길을 재촉해야 할것만 같았다.

그 때 한 쪽 다리를 다쳐 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풀 밭 한가운데서 뒤뚱거리는 오리 한마리가 눈에 띄었다. 산책하던 사람들 누구도 유심히 보아 주지 않았음은 물론, 그를 해치려는 움직임조차 없었음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오리의 불안한 눈빛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살고자 하는 본능은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모든 살아 있음은 등가의 절망과 희망으로 이루어 졌다는 말이 떠올랐다.

다리를 다친 오리는 지난 주 내내 나와 함께 있었다. 비록 일상에서 한숨 돌린 후 호젓이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거나,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일의 시작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들여다 보는 틈새의 시간이었지만 말이다. 그 처연한 눈빛을 떠올리는게 고작이었지만 내 일상으로 뛰어나온 오리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음은 분명했다.

어쩌면 오리의 안부가 궁금한게 아니라 내 편안한 마음을 위해서 오리의 상태가 궁금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나는 다음 주에도 다른 일을 미루고서라도 오리가 있던 숲에 달려 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른 오리들과 강물에 들어가 유영하는 오리를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오늘은 집에 가는 길에 꽃을 사야겠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단조로운 회색의 건물에 작은 화분을 들여 놓는 일 보다 쉬운 일이라고 믿기에,

<최동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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