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체면과 정신건강

2018-09-18 (화) 김화수/ 뉴욕가정상담소 정신건강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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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상담을 하게 되면 양파 껍질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마음을 한 번에 다 풀어놓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조심스럽게 안전한가를 살피며 서서히 열게 마련이다. 아시안들에겐 특히 더 그런 것 같다. 외국인들이 자기에게 어떤 불이익이 있을까 우려할 때 조심하려 든다면, 아시안, 특히 한국인들은 자기체면 때문에 잘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흔히 말하는 체면 문화는 자신의 명예를 유지하고 모욕적이거나 황당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익혀진 무의식적인 전략이다. 이렇게 체면이 중요한 문화이다 보니 정신적인 질병이 있거나 가정 폭력에 노출되어 있을 때 그것을 드러내거나 도움을 요청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음을 열었더라도 체면이 깎이는 일이 생기면 후퇴하거나 닫아버리게 된다.

이 체면문화의 이면에는 상대의 인정이나 찬사를 중요시하며 개인의 삶을 공동의 의견과 평가에서 분리하기 어려워하는 성향이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솔직하기가 어렵고 무언가 보기에 그럴듯해야 존재 가치를 느낀다. 그렇지 않으면 구설수를 피할 수 없고 낙오자란 느낌까지 들게 한다. 사람이란 동물은 서로 어울려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인데 가려야 하고 체면을 지켜야 하고 포장하며 모든 것을 혼자 헤쳐나가려니 무겁고 고통스러운 결과가 초래되어진다.


이런 고착된 흐름은 우리 스스로를 가두고 한걸음 더 앞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도움을 요청할 때 비난과 판단이 따라 온다면 병을 짊어질망정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마음이 앞서서 그럴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할 어떤 도움이나 치료 방법보다 진정한 관심과 격려가 아닌가 싶다.

서로를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자세. 늘 속전속결을 사랑하는 우리네 민족에겐 더욱 그런 것 같다. 내담자를 돕고 변화를 기대할 땐 당장 문제가 풀어지길 소망한다. 그러나 그 하나의 작은 열매를 맺기 위해 함께 울고 웃고 기다려 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고 함께 걸어 주어야 하는 길은 긴 여정일 수 있다. 이런 동행속에서 사람들은 마음 문을 조금씩 열게 되고, 이렇게 열기 시작한 사람은 커다란 무너짐에서 자신을 지켜낼 힘을 얻게 된다. 자신감내지 가능성에 대한 소망을 갖기 때문인 것 같다.

격려를 통해 얻어지는 이런 의지는 특히 한국인에겐 꼭 필요한 요소인 듯하다. 상담 심리 용어중에 ‘통제의 위치’(Locus of Control)란 말이 있다. 쉽게 말해서 누가 나의 삶을 지배하냐는 것이다 두 가지 답 즉, 내적(Internal)인 것과 외적(External)인 것으로 나뉜다. 나의 삶을 통제하는 것이 외부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 주로 동양사람들은 인생을 운명론으로 끌고 간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피할 수 없는 팔자에 매어있다고 믿고 진전하기를 힘들어 한다.

반면 삶의 통제가 내부, 즉 자기 안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 주로 서구 사람들은 인생은 자기가 결정하고 밀고 나가기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삶에 책임감과 적극적인 태도를 갖고 사람들의 이목을 쉽게 배제하기 때문에 훨씬 빠르게 벗어나고 진전한다고 한다.

체면과 운명론으로 서로를 얽어매는 사회 풍조에 우리 스스로를 오랫동안 묶어왔다면 이젠 서로를 격려하고 인내하고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닌 가 싶다.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도 비판이 따르지 않고 서로 신뢰하며 용기를 내어 창조주가 뜻한 풍성한 삶이 이뤄지길 소망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기대해 본다.

<김화수/ 뉴욕가정상담소 정신건강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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