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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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거짓말

2018-09-1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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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lie/perjury). 한 평생 살면서 거짓말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을까. 언젠가는 들통이 날건데 거짓말을 한다. 거짓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할 때 오는 자괴감(自愧感). 자괴감이란 자신의 무능함이나 한심함 때문에 생기는 부끄러운 감정이다. 그러함에도 거짓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하얀 거짓말이다.

하얀 거짓말. 거짓말은 거짓말인데 색깔이 새빨갛지 않고 하얗다. 선의(善意)의 거짓말(White lies)이라 할까. 1년 중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해도 되는 날. 4월1일. 만우절(萬愚節)이다. 이날 하는 거짓말은 모두 하얀 거짓말이다. 웃기기 위해서. 하루를 즐기기 위해서. 그러나 이날도 거짓말이 도가 넘으면 사회문제화 될 때도 있다.

거짓말에 대한 철학자 칸트의 주장. 그는 “비록 살인자 앞에서도 친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잘못”이라 한다.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으로 잘 알려져 있는 칸트. 이 책에서 그는 형이상학을 학문으로 정립시키려 했다. 우리에게 있어 확실한 인식(認識)은 감성과 오성의 협동에 의하여 성립된다는 그의 이론.


인식된 지(知)를 소수의 원리로 정리해 가는 것을 이성으로 그는 보았다. 독일 관념철학의 아버지 칸트. 완전히 자유로운 도덕적 인격을 도덕률로 삼은 칸트. 부모의 청교도적 생이 칸트의 소년시절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그런데 그의 거짓말에 대한 정의. 거짓말 안하는 것을 목숨보다 중히 여긴 칸트. 인간적 냄새가 안 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한국 불교 선종(禪宗)을 대표할 성철스님이 한 말이다. 서슬 퍼런 박정희정권 시. 박대통령이 그를 만나려고 했으나 거절당했을 정도로 산을 내려오지 않았다. 돈오점수(頓悟漸修)보다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한 그. 돈오돈수는 찰나에 깨달아 부처가 된 후 더 수행할 것이 없다는 이론이다.

돈오점수는 점진적인 수행을 통해 깨닫는 방법이다. 고려 중기의 보조국사 지눌이 당나라 승려 규봉 종밀(780-841)이 제시한 수행방법을 빌려온 것. 1993년 82세로 입적한 성철스님의 임종계. 자신은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친다고 했다. 평생 법문이 모두 거짓말이란다.

성철스님의 임종계, 즉 죽기 전에 내린 계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임종계 후미 전문을 보자.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범부(凡夫)로선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인류의 가장 큰 딜레마는 종교적 탈을 쓴 거짓말의 증폭이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분별할 수 없게 만드는 종교. 특히 수천 년의 전통을 가진 고등종교의 경우. 교권에 의해 교리화(敎理化) 된 종교의 두 얼굴은 그동안 수많은 비리들을 자행해 왔었다. 그리고 지금도 보이지 않게 사람들의 머리와 양손 양발을 묶어 놓고 있음에야.

진실한 건 사람의 생각과 입김이 닿지 않은 자연만이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 같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자연 아닌가. 인간에 의해 수없이 당해만 오고 있는 자연. 그래도 불평 한 마디 안한다. 하늘과 땅. 구름과 비. 물과 산. 그들이 거짓을 말하는 것을 보았는가. 인간을 품고 사는 하늘과 땅의 참음도 한계가 있을 텐데.

하얀 거짓말. 죽어가는 환자에게 희망을 주려하는 의사의 거짓말. “당신은 죽지 않습니다.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좌절에 빠진 자식에게 주는 부모의 거짓말. “너는 할 수 있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어.” 오 헨리의 작품. ‘마지막 잎새’. 그림으로 그려진 담쟁이 넝쿨의 거짓으로 된 마지막 잎새가 희망으로 다가온다.

세상에서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부류의 사람이 있다. 정치가다. 특히 대통령은 거짓말의 도사가 되어야 그 자리를 지킨다. 새빨간 거짓말쟁이. 그래도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또 있으니. 내가 말하는 거짓말이 친구의 목숨을 살린다면, 나는 거짓말을 하겠다. 목숨까지도 살릴 수 있는 하얀 거짓말. 그건 해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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