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누름돌

2018-09-07 (금) 고명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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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예쁘다. 나뭇잎은 바람이 데려온 햇살을 안고 녹색의 왈츠를 춘다. 창가에 잠시 머무르다 지붕위로 사라져 가는 습기를 덜어낸 흰 구름도 눈이 부시다. 눅눅한 집안 곳곳에는 여름의 잔재가 아직 머물러 있다. 진득하게 발효를 끝내고 찾아온 계절을 겸손하게 맞아들인다.

한때 뜨겁게 애태우던 가슴앓이의 흔적이 조금씩 지워져 나간다. 냉한 기운으로 돌아가던 몸 안의 곳곳이 양기를 갈망한다. 세월로 가는 시간을 타고 기차처럼 빠져나간 긴 꼬리의 여운을 잠시 붙잡아둔다.

여름동안 식초와 소금과 간장으로 인해 누렇게 변해버린 플라스틱 용기를 비웠다. 깻잎이며 오이, 고추를 담아 숙성시킨 뒤에 여름 밥상에 끼니마다 올렸던 플라스틱 용기다. 벗어날 수 없는 역할 탓이었는지 뜨거운 물로 몇 번을 닦아도 뽀얗던 본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신맛, 짠맛, 단맛까지 배인 플라스틱 용기에 펄펄 끓는 물을 부어 대니 사람 피부라면 깊은 화상을 입을 것이다. 플라스틱 용기나 사람이나 당당하게 버텨야 여름을 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묵직한 돌덩이까지 올려 숨통을 조였으니 그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플라스틱 용기에 반찬이 될 재료를 담을 때마다 정작 필요한 것은 누름돌이라고 하는 묵직한 돌이다.

빨리 숙성시키기 위해 서로 다른 맛을 내는 재료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숨이 죽지 않은 깻잎이며 오이, 고추는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몸부림치며 수런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 누름돌로 눌러두면 쉽게 수그러들었다. 그처럼 누름돌은 숙성을 도왔다. 뻣뻣한 자존심이나 팔팔한 성질도 누름돌 밑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은 새콤달콤한 맛은 산뜻하고 깊이가 있어 눅눅해진 마음의 피로마저 말끔하게 씻어낸다. 우리의 삶도 순간순간의 고통을 진득하게 견뎌내야 달고 알찬 열매를 얻을 수 있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누름돌을 준비 못 한 나는 이민 보따리에 싸서 어렵게 가져왔던 반들반들한 장식품 수석을 물에 젖지 않게 비닐로 꼭꼭 싸매서 누름돌을 대신하고 있다. 집안에 한 쌍의 돌이 더 있다. 하나는 주둥이가 좁은 항아리 모양이고 다른 하나는 허리가 잘록한 화병을 닮았다. 친정아버지가 애지중지하시던 물건이었는데 크고 무거워 누름돌로는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아끼시던 대리석 자기를 이국만리 떠나는 여식에게 딸려 보낸 뜻을 이제야 알아 가고 있다.

나의 청소년기 한때는 아버지가 일으킨 풍랑 위에 스스로 서 있기 위한 몸부림이 있었다. 밀가루 수제비 속에 빠져버린 꿈을 건져 올리지 못할까 봐 두려움에 시달렸다. 슬픔과 설움은 요동쳤고 지금처럼 예쁜 바람에도 몹시 가슴 시렸다. 하얀 종이 위에 이름 모를 부호를 찍으며 보이지 않는 꿈을 찾아 나설 때 아버지는 두툼하게 쌓인 신문지를 펼쳐놓으시고 붓끝에 힘을 모아 가장으로서의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심정을 적어 내려갔다.

붓끝에는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진한 먹물이 묻어있었고 적은 글씨는 나에게 지울 수 없는 문신이 되어버렸다. 그 어렵던 시절은 지금의 누름돌이 되었다. 크고 무거워서 사용 못 하는 한 쌍의 대리석 자기만큼이나 내 마음을 짓누르는 누름돌로 다가오고 있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나는 누구의 누름돌이 되고 싶어 예쁜 바람을 부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고명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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